이르쿠츠크에서부터 타고 온 승합차가 올혼 섬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엔 터미널이 없는 대신 승합차 운전사가 승객들마다에게 목적지를 물어 그 앞에 내려줬다. S와 나는 미리 예약해둔 니키타 하우스에서 내렸다.
니키타 하우스는 올혼 섬에 온 관광객 대부분이 묵는 대표적 숙소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2~3층 목재 건물 몇 동으로 이뤄진 또 하나의 작은 마을이 펼쳐졌다. 이르쿠츠크에는 목재건축과 그 건물의 창틀과 처마를 레이스처럼 장식하는 나무공예가 발달돼 있다. 다른 집과 자신의 집을 구별하는 방법이자 악귀를 쫓는 풍습이란다. 그 전통과 닮은 듯하면서도 현대적 해석을 더한 나무공예 작품들이 멋있었다.
대문 바로 옆에는 원래 리셉션 자리로 보이는 건물이 한 채 있었으나 리셉션을 옮겼다는 안내문구만 있을 뿐 어디로 옮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찾자 이번에는 안에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직원을 만나 방을 배정받았다.
직원은 긴 여행에 지친 우리를 위해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식사를 할 수 있게 식당으로 안내했다. 섬 안에는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 같은 편의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니키타 하우스에서는 숙박을 하면 하루 세끼 식사가 자동으로 제공됐다. 덕분에 여행을 하면서 잘 몰라 먹지 못했던 러시아 음식들(블리니와 솔리얀카, 바이칼 호수에서만 난다는 생선 오물 등)을 실컷 맛볼 수 있었다.
처음 직원을 찾기 어려웠던 것에서도 눈치 챌 수 있듯 숙소는 비수기라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단 두 팀과 마주쳤을 뿐인데, 이르쿠츠크에 사는 러시아 여성과 그녀를 보러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미국인 남성 커플, 그리고 여기에 머물며 그림 작업을 하고 그 그림을 식당에 전시해 파는 화가 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인원이 채워져야 할 수 있는 섬 반대편으로의 투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한적한 분위기와 오랜만의 휴양이 나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와 푸짐한 음식을 먹고 러시아 전통 사우나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뜨거운 김에 뻐근했던 몸을 녹이고 방으로 가며 쐬는 밤 공기가 상쾌했다.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사람... 이럴 수가숙소에서 식사는 제공됐지만, 틈틈이 마실 음료 따위가 필요해 근처 슈퍼마켓을 찾았다. 진열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안쪽에서 발을 제치고 사람이 나왔다. 냉장식품은 카운터 뒤쪽에 있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점원이 집어주고 계산하게 돼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가락으로 이거, 아니, 저거를 반복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물건을 가리키던 손을 여자에게 가져다 대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섬에 올 때 같은 승합차를 타고 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슈퍼를 나와 조금 걸으려니 자동차 하나가 빵빵거리며 다가왔다. 그 안에는 역시 승합차를 같이 타고 온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일몰을 보러 올라가던 언덕에서는 그쪽을 관광하고 내려오는 러시아 관광객 부부를 만났다. 승합차에서 우리 뒷자리에 앉았다며 아는 척을 해왔다. 한 승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을 하루 만에 모두 다시 만난 것이었다.
걸어서 한 바퀴를 도는데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배우가 모자라 한 사람이 여러 역을 맡는 가난한 극단의 작은 연극에 들어온 듯 정겹고 재밌었다.
평화로운 마을서 만난 내 생애 첫 개슈퍼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문 옆에 누워있던 개 한 마리가 일어나 S와 내게 다가왔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내 바지에 코를 바짝 대고 킁킁대는 개의 모습에 질색을 했다. 하지만 S는 이 개에게 사람을 따르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고, 단지 사람의 냄새가 반가워 그 냄새를 익혀두려는 것뿐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뜨자 개는 우리가 가려는 방향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 멀리서 어서 오라며 우리를 빤히 바라본 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따라 언덕을 올라 일몰을 감상했다. 일몰을 보는 것까진 좋았는데 날이 저물자 동네는 스산해졌다. 낮에도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차 몇 대 외에 인적이 드물었지만 밤에는 그나마 외출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사이로 주인 없는 개들이 나타나 우리를 빙 둘러싸고 짖어댔다.
그러자 아까 그 개가 나타나 우리에게 덤벼들려는 다른 개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숙소까지 안전한 길로 안내해줬다. 무척 고마웠지만 길거리 개를 숙소 안에 들일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서 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린 뒤 얼른 우리 둘만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조금 쉬다 씻으러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떻게 빗장을 풀었는지, 그리고 그 많은 방들 중에 어떻게 우리 방을 찾았는지 개는 우리 방문 앞에서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행히 보이지 않았는데, 숙소를 나와 산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서 꼿꼿이 걷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데 한 번도 정을 받지 못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개를 키워본 적 없었던 나는 그 개를 나의 첫 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를 보러 올혼 섬을 다시 찾기로 약속했다. 심심한 듯 평화롭고 쓸쓸한 듯 정다운 후지르 마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