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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세 개 개선문 중 내가 우선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티투스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현존하는 세 개선문 중 연대에 있어 제일 앞설 뿐만 아니라 후대의 개선문 건축에서 하나의 롤모델 역할을 해왔다. 나는 이 티투스 개선문을 볼 때마다 건축의 양식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지만, 솔직히 이 황제와 연관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티투스? 과연 그는 누구인가.

 티투스(사진 왼쪽)와 베스파시아누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티투스(사진 왼쪽)와 베스파시아누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 박찬운

티투스(39~81 AD)의 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플라비우스 가문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라는 뜻임)인데, 기원후 1세기경 로마의 명문가문인 플라비우스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난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일 플라비우스 왕가의 초대 황제가 되는 집정관 출신의 장군이었다. 그가 태어난 기원후 39년은 바로 네로 황제가 태어난 후 2년 뒤다. 그는 네로와 동년배로 살았으며 어린 시절 네로의 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궁을 제집같이 들락날락 거리며 당시 황태자였던 두 살 아래인 브리타니쿠스와 소꿉친구로 자라났다.

티투스는 성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 로마군단의 장교로 성장한다. 그는 게르마니아와 브리태니커에서 전공을 세우며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가 전승 장군으로서 개선문까지 선물 받게 된 동기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과의 악연 때문이었다. 그는 서기 70년에 있었던 로마군단의 예루살렘성 파괴의 선봉장으로서 유대인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업적으로 개선문을 선물 받게 된다. 티투스의 성공적인 유대인 진압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도록 촉진했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2000 년을 유랑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중동이 세계 분쟁의 화약고가 되는 먼 원인을 티투스가 제공한 것이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혼미의 와중에 있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불리는 네로가 68년 그의 시종장에 의해 암살된다. 그러고 나서 로마에는 수 명의 황제가 등극하지만 취임 후 곧 제거되는 정변 사태가 계속된다. 네로 사후 1년 사이에 무려 4명의 황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때 나타난 사나이가 티투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그는 네로 생전에 일어난 팔레스타인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네로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팔레스타인에 나와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와 함께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반란 지역을 하나하나 접수하면서 내란을 진압한다. 티투스는 이 전쟁에서 교활하면서도 과감하게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큰 공적으로 세우며 그 이름을 제국 전역에 떨쳤다. 이 상황에서 네로가 죽고 황제들이 나타나 서로 죽고 죽이는 내란이 로마에서 일어난 것이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휘하 로마군단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뒤 발 발굽을 로마로 옮긴다. 이때 그는 팔레스타인의 수습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긴다. 서기 70년 티투스는 유대인 팔레스타인 반란 진압 작전의 전권을 쥐고 마지막 공략지인 예루살렘성으로 향한다. 이 해에 벌어진 예루살렘 전투는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수십 일간의 항전이 계속되었지만 유대인들이 막강한 로마군단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성내로 들어가 유대인들을 도륙한다(이 전투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는데, 이때 무너지지 않은 성벽이 바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그렇게 신성시하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시기 유대인으로서 이것을 기록한 요세푸스는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로마군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아무리 생각해도 이 숫자는 과장된 것 같다), 십여만 명의 유대인들이 잡혀 노예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세계로 떠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70년의 예루살렘성 함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꽤 길어지는데, 독자의 이해를 위해 조금만 더 부연해 보자.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팔레스타인 외의 지역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것이 바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뜻이다)을 대략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두 번에 걸쳐 나오는 데, 첫 번째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에 의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다(구약 열왕기상). 당시 유대인들은 남북 왕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기원전 722년)해 많은 유대인들이 아시리아로 끌려간다. 그러나 역사에서 본격적인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출발점은 그로부터 대략 200년 뒤에 나타난다.

기원전 7세기 초에 바빌론에 강력한 왕조가 들어서는 데 바로 그것이 구약 성경상에 나오는 느브갓네살(네브카드네자르 2세)이 다스린 왕조(신바빌로니아)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유다왕국을 멸망(기원전 586년)시키고 유대인들을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구약 역대상). 우리는 이를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라 부른다.

그러나 바빌론 왕국은 곧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멸망된다. 아케메네스의 창설자인 키루스는 유대인들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취한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대인들은 돌아가도 좋다는 선린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귀환 후에도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등지에 남아 유대인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유대인들은 그 후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를 맞이하여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만들어 간다. 로마제국 하에서는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로마에 의한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는데, 이후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지중해의 이곳저곳에서 둥지를 틀게 된다. 대표적인 곳이 로마제국의 동방 수도라 할 수 있는 안티오크 그리고 헬레니즘의 수도라 부를 수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들 도시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하나님 말씀 토라(토라는 구약 성경 중 모세 5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교의 율법서를 말한다)와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인 랍비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나간다. 종교로 무장되고 독특한 혈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대인들의 공동체 의식은 다른 어떤 민족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이 바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세계사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원후 1세기 중반까지는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본거지가 살아 있었다. 그들이 최고의 성전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유대인들의 본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지막 성지를 티투스가 철저히 유린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는 그 이후의 황제인 5현제 시대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로 이어져 팔레스타인 유대인 본거지는 완전히 파괴되고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유대인들의 공동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세기 초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완성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의 현실을 보면 그 가정에 유혹을 느낀다. 만일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이 없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군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보다 후일 일어난 이슬람 종교 그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적 상상이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 함락뿐만 아니라 황제가 된 뒤에도 로마인들에게는 꽤나 인상 깊은 황제였다. 아버지가 해오던 로마인들의 투기장인 콜로세움이 그의 치세에서 완공되었고 이것은 그 후 거의 2000년 동안 로마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황제 즉위년인 79년엔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나폴리 인근 도시 폼페이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주변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 이를 수습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과업이었는데 티투스는 이 시련에서 황제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한다. 그로 인해 그는 제국의 신민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는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 황제 즉위 2년 만에 급사한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이 찾아와 그는 41세의 나이에 조용히 운명한다.

이제 티투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았으니 그의 개선문을 바라보자.

 티투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 박찬운

포로 로마노의 남동쪽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개선문은 티투스가 재위 2년 만에 요절하고 그의 뒤를 넘겨받은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즉위 즉시(82년) 형의 70년 예루살렘 공략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이 개선문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은 18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 세워지는 여러 개선문의 모델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후에 보게 되는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이다.

티투스 개선문은 다른 개선문에 비해 그리 웅장한 것은 아니다. 전체 높이 15.40m에 폭 15.50m, 아치 높이 8.30m에 폭 5.36m의 크기다. 이 개선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우선 개선문 상단의 문자다. 로마시대의 어느 개선문에서도 볼 수 있는 헌사가 있다. 지금도 다음과 같은 명문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SENATVS
POPVLVSQVE·ROMANVS
DIVO·TITO·DIVI·VESPASIANI·F
VESPASIANO·AVGVSTO

이것을 해석하면 이렇다.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은 신격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신격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개선문을 바친다."

이 개선문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조는 남쪽 면에 부쳐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성전을 파괴하고 그곳에 소장된 주요 보물을 약탈하는 장면이다. 성전의 대형 촛대를 병사들이 옮기는 장면이 2000년 전 티투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전을 목전에서 보는 듯하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장면을 보면 가슴이 메어진다. 저 촛대가 그냥 촛대가 아니고 2000년 유랑을 예고하는 상징 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로마에 갈 때마다 티투스 개선문을 살펴보았다. 그럴 때마다 하나의 의문이 맴돌았다. 이 개선문이 어떻게 2000년을 버티고 우리 앞에 서 있는가. 이 개선문 앞의 포로 로마노는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땅속에 있던 유적지다. 그런데 바로 그 근처에 있는 이 개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게 된 데에는 어떤 곡절이 있었을까.

자료를 찾아본 바 이 개선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다른 개선문(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같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로마의 유력자 저택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워낙 견고하고 잘생긴 탓에 기독교인들도 파괴하기가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18세기까지 한 가문의 저택 망루로 사용되다가 19세기에 들어와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이 복원은 당시 교황 비오 7세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이 개선문의 상단의 다른 한쪽에는 비오 7세의 복원을 기리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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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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