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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서른 세 살이잖아. 30대는 서래마을 같은 곳에서 밥을 먹어야지. 강남역처럼 대학생들이 노는 떠들썩한 곳은 버겁단 말이야."

7년 만에 만난 동갑내기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은, 서른이 넘은 지 3년이나 지났지만 30대라는 것을 진지하게 인식해보지 못한 내가 거의 최초로 나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했다. 더군다나 서른 살이 넘은지 3년이 지나도록 서래마을에 발을 디뎌보지 못한 나로서는, 밥을 먹는다는 화두가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어디서 먹을 것인가'에 대한 문화적 영역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는 과연 어떤 음식을 먹어왔는가? 아니, 어떤 음식에 길들어져 왔으며 어디에서 어떻게 먹는 것에 익숙해 있었는가를 성찰해보는 문제는 굳이 외국 나이로 따져 보아도 31살, 아무래도 갓 30대를 넘어선 이 시점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의젓한 일로 보인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엎어 올린 10대

10대의 식문화를 이야기하자면 한국사회의 청소년이 겪어왔던 전형적인 중고등학생 시절을 빼놓을 수 없겠다.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사먹던 10대 전반기의 나이를 지나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의 외식에는 매점의 문화가 추가되었다. "엄마 지갑에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빼서 써라"는 독특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라난 나는 돈에 대한 개념에 똑똑하게 눈뜨지 못했다. 더불어 엄마 지갑에서 언제 얼마만큼의 돈을 빼서 써야 되는지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했었지만, 매점에서 사먹는 간식에 대해서만은 자유로웠다.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암묵적 외톨이로 방황하면서 생긴 유일한 취미는 매점에서 사먹는 과자와 사탕이었고, 이 두 가지 음식은 엄마에게 요구하면 절대로 사주지 않는 금기항목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특별할 것 없이 절대적인 먹거리는 엄마가 해주는 집 밥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 엄마가 해준 음식 중 특별히 맛있는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 이유는 엄마의 요리솜씨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밖에서 사먹는 간식이 특별하게 달콤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해야겠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된 외식문화는 점차 커피숍과 외부 식당으로 발전되었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땡땡이를 치고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사먹는 일은 일종의 영웅 심리로 미화되어 저장된 기억들이다. 빡빡한 학교생활과 강의식 수업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의 심리랄까. 학급의 맨 뒤, 창가에 딱 붙어 앉아서 창밖으로 부서지는 은사시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를 끄적거리던 행태와 함께 매점의 간식들은 그 와중에 나를 지탱해준 유일한 두 가지 힘이었다.

술과 과자에 취한 20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대학생이 되면서 급격하게 술 문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더군다나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며 자취생활을 시작하였고, 첫 번째로 선택한 식습관은 내가 해먹는 규칙적인 밥이 아니라 과자와 술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학생식당이나 편의점 혹은 라면이라도 이용했지만, 나는 이상하리만큼 과자에 과도한 집착을 보였다. 자연스레 당시 꿈은 내가 좋아하던 과자를 만들던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더불어 술맛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술을 먹으면 굉장히 그럴싸한 대학생이 된 듯한 그 기분이 좋아, 깨어 있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어둑한 술자리를 무척이나 즐겨했었다. 어떻게 보면 대학생활의 술자리에서 나는 지난 10대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원했고, 다니고 싶지 않던 대학에 대한 탈출심리가 반작용으로 적용되어 바스락거리며 먹고 쿨럭거리며 마시곤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잘못 길들여진 식습관은 후에 건강을 해치는 적신호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건강관리나 식이요법에 관한 신경을 쓸 정도의 나이가 아니었던지라, 그저 과자와 술이 주는 뒷맛 좋지 않은 안정감이 무척이나 편안하기만 했다. 대학 졸업 이후의 20대 후반에는 과자와 술이 치킨과 맥주, 치즈와 와인이라는 수순으로 조금씩 고급화되었을 뿐, 20대의 술 문화는 계속되었다.

다시 서래마을로

서래마을에 오기 전에 검색했던 몇몇 블로그에서는 이곳이 적잖은 연예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것과 사람들이 주말 브런치를 즐기러 종종 찾는 마을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시절에도 역시 학교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던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두었던 학생기자 동아리의 모임이 근 11년 만에 있었고, 그간의 세월은 6명 모두를 30대의 그늘로 포섭시켰다.

대부분은 결혼을 했고 몇몇은 애 엄마 애 아빠가 되었으며, 거의 모두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노무사의 특별 관리를 받는다는 최저임금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월급을 까볼까 어쩔까 운운하는 농담을 들은 동기들은 따뜻한 감자뇨끼와 시금치 플랫브래드 그리고 차가운 팥빙수를 사주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10대와 20대는 꽤 어두웠다. 항상 학교라는 제도에 적응하는 일에 힘들어했고, 사회라는 울타리에 들어오는 것에 겁을 냈었다. 가장 애착을 가지던 동아리 사람들과도 의식적으로 연락을 끊은 지 7년이 되던 차였다. 힘겨운 10대와 20대를 보내면서 언제나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들을 넘어서기를 원했지만 딱히 사회를 바꿀 만한 꿈을 꾸지 못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힘에 대하여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그 힘의 일부가 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10대와 20대의 청춘을 그리워하겠지만, 나는 내가 힘들게 떠나보낸 10대와 20대에 대한 미련이 손톱만큼도 없다. 나이에 대한 기준 또는 어떤 가치에 대한 판단은 원래 그런 거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30대가 밥 먹으러 가기에 적합한 동네는 서래마을이 아니라 딴 동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30대에 꾸는 꿈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시집이나 가라는 '개마초'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언제나 상실 혹은 부재의 힘이 주는 힘은 엄청나다. 계속해서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결핍'이라고 말했던 국제사회복지사 김해영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충족된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지만 인생에 결핍이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 간극을 메우는 새로운 힘을 찾아 꿈을 꾸게 된다는 이야기다.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한 일본의 1960년대를 가로질러 한국의 2013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유일한 힘은 우리가 모두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황하는 20대가 선사했던 길고 긴 터널의 통과하여 30대의 문을 열어젖힌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새로운 젊음에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상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것이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굿바이 10대. 아듀 20대. 그러나 청춘만은 내게 아직 그대로.

덧붙이는 글 | '있다 없으니까'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10대, #20대, #30대, #서래마을,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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