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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결혼한 지 18년이 넘었습니다. 양가 모두 그냥그냥 서민으로 사는 남녀가 만났습니다. 남편인 저라도 손재주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마냥 남는 결혼생활. 1년 후 아이를 출산하고 백일과 돌을 맞았습니다. 첫 아이는 울산에서 출생했기에 작은 돌잔치를 했었지만 5년 후 둘째 출산때는 타지에 살고 있어서 변변한 백일과 돌잔치도 못했습니다. IMF로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지고 미래가 없어 보여 그만둬 버렸습니다.

그후부터 어려워진 가정형편은 지금까지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울산에서 다니던 직장은 용인공장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희망퇴직을 했었습니다. 그때가 1998년 말. 귀농이라도 해볼까 싶어 용인 시골살이를 시작하려 했지만 울산 공장생활만 하다가 용인 시골서 뭐라도 해보려니 뭘 알아야 하지요.

'아이들 돌반지 팔까?" 생활이 어려웠던지 아내는 어느날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 돌반지 팔까?" 생활이 어려웠던지 아내는 어느날 그렇게 말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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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처럼 공장생활 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귀농 같은 걸 하려는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몇 개월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서울은 엄청 큰 도시이니 저같은 기능없이 단순노무직종을 찾아보면 있겠거니 생각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가까운 곳에 허물어질 듯한 기와집이 있어 그곳에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이사 후 다시 직장을 찾아 헤맸습니다. 교차로를 보면서 직장을 찾았으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당장 급한 대로 은행 청원경찰 자리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니 모두 파견용역업체였습니다. 처음 파견된 곳은 압구정동 어느 지역에 있는 평화은행. 그때가 1999년이었고 월급이 80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은행서 주는 10만 원 별도 수당을 보태 90만 원. 우리 가정은 그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돌반지 팔까?"

생활이 어려웠던지 아내는 어느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자식들 돌반지를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기념으로 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비정규직 일자리로 생기는 월급으론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던지라 돈 빌릴 곳도 마땅찮은 우리로서는 달리 돈 만들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자식들 돌반지를 팔아서 생활비에 보탰습니다. 저는 며칠간이나 안쓰러운 마음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기술과 기능이 없는 사람이 서울서 사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압구정 평화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다른 일자리를 찾자니 없었습니다. 그러다 찾은 게 서울 고속터미널서 가까운 반포동 근처에 있는 보람은행 청경자리였습니다. 그곳은 75만 원 월급에 10만 원을 은행에서 주는 수당으로 받았습니다. 그마저도 은행이 어렵다며 나중엔 5만 원 깎아 버렸습니다. 몇 개월 후 다시 보람은행이 없어지고 하나은행으로 통폐합되었습니다. 간판 공사를 하더니 하나은행으로 모든 시설물이 바뀌었습니다.

2000년 5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사이 서울역 전세집에서 사당동 전세집으로 한 차례 집을 옮겼고 사당동 전세집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고 했습니다. 당장 오갈 데도 없고 해서 약 2년 정도의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울산 와서 2개월 정도 직장을 알아 보다가 우연찮게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는데 2010년 3월 중순경 느닷없이 잘 다니던 하청업체서 정리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생계 걱정이 다시 시작 되었습니다. 이곳저곳 2차·3차 하청업체 다녀봤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이리저리 떠밀리며 비정규직으로 살다보니 우리 가정의 생계문제가 다시 곤두박질 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다 팔아야겠다."

아내는 남아 있던 폐물을 꺼내면서 말했습니다. 선물로 받은 은수저 세트와 결혼 예물 반지와 팔찌,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깊은 한숨이 나올 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과 미안한 마음만 교차되었습니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났더라면 이런 고생 안 할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내는 귀금속 집에 가서 나머지 귀금속을 모두 처분해서 생계비로 썼습니다.

현대차는 일방적인 선별채용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무마시키려는 거 같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불법파견 인정하라고, 대법판결 이행하라고 벌써 300여일째 현대차 명촌문 철탑 위엔 두 사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일방적인 선별채용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무마시키려는 거 같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불법파견 인정하라고, 대법판결 이행하라고 벌써 300여일째 현대차 명촌문 철탑 위엔 두 사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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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에서 정리해고 당한 지 3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현대차는 지난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으로부터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습니다. "부당해고에 해당한다"는 변호사님 말에 저도 희망을 걸고 '정규직 전환' 복직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일방적인 선별채용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무마시키려는 거 같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불법파견 인정하라고, 대법판결 이행하라고 벌써 300여일째 현대차 명촌문 철탑 위엔 두 사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 마음을 휘감고 있습니다.

다시 가정의 생계를 위해 찾은 직장은 학교 비정규직 일자리 입니다. 지금 다니는 일자리는 임시직이고 일용직이라 정규직이 발령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고용불안 일자리에 불과 합니다. 하루 빨리 현대차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복직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도 더이상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지 18년이 넘었고 15년 전과 3년 전 가장의 돈벌이가 사라져 어려운 가정경제를 이어가려고 모든 귀금속을 처분해 버렸습니다. 저는 가끔 지나다 귀금속 가게를 봅니다. 가까이 가서 아기들이 선물받는 돌반지를 보곤 합니다. 자식들 돌반지와 결혼 예물로 주고받은 것을 처분해 버린 심정이 지금도 서운하고 못내 안타깝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구비해 놔야지 하면서 예까지 왔네요. 나이는 자꾸만 들어가고 마지막 희망처인 현대차 정규직 전환된 복직 일자리마저 멀어지는 거 같아서 시름만 더 깊어지고 있답니다. 현대차가 불법파견 인정하고 대법판결 이행해서 저에게도 정규직 전환 복직 꿈이 실현 된다면 부지런히 돈 벌어서 그동안 진 빚 모두 갚고 자식들 돌반지와 부부 인연으로 만들어진 폐물을 다시 구비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 같은데….

덧붙이는 글 | 있다 없으니까 <응모글>



태그:#울산,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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