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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진 기록가 이토 다카시는 1991년 10월부터 한국, 북한, 대만, 필리핀을 12차례 방문해 이름을 밝힌 피해여성 56명을 만났다. <종군위안부>는 27명의 정신대 생상한 증언과 사진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온 열 여덟 살 먹은 여자가 심하게 반항하자 군인들은 그녀를 발가벗긴 다음 커다란 나무에다 하루 종일 거꾸로 매달아 놓더군요. 그래도 그 여자가 "하루 20~30명에게 강간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말하자,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시신까지 칼로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그리고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고기밥이나 되게 한다고 냇가에 내다버렸습니다.

 

열 여섯 살 때 저는 불행하게도 임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교는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지 못하는 조선 여자의 아이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제 배를 째고 태아를 꺼내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경생 1917년 생 현재 평안남도 대동군 거주-

 

저 끔찍한 범죄는 1992년 8월 12일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 평양에서 4명의 피해 여성과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만나 이경생 할머니에게 들은 증언의 일부다.

 

일본은 13세 이상의 조선의 가난한 어린소녀와 반 일본 성향 집안의 소녀들을 강제로 일본 후쿠오카, 미얀마 랭군 필리핀, 사할린 등지로 끌고 가 일본군 성노예로 삼았다.

 

일본군의 중국여성 강간사건이 불거지자 조직적으로 조선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가 곳곳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다. 각 면마다 할당이 주어지자 면장, 학교장 등이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그들은 가난한 집에는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속이고 심지어 밭에서 어머니와 일하고 있는 소녀를 위협해 끌고 가기도 했다.

 

생존자 27인의 증언은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13살 소녀가 끌려가 하루 30~70명의 군인을 상대하고 조선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다.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죽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 죽이는가 하면 생리 때도 헌병을 상대해야 했다, 위안부의 머리를 잘라 삶은 물을 강제로 마시게 했고 패전 후 조선인과 중국인 위안부를 죽여 증거 인멸을 꾀했다. 하지만 1991년 여름, 강덕경 할머니가 정신대로 겪었던 고초와 일본이 저지른 죄상을 세상에 폭로함으로 일본의 증거인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정신대 할머니들은 침묵을 깨고 '명예회복과 진심어린 사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수요 시위를 일본대사관 앞에서 20년이 넘도록 이어오고 있다.

 

68주기 광복절을 3일 앞둔 지난 8월 12일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 이용녀(87)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용녀 할머니는 16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이용녀 할머니의 별세로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해외거주자 8명을 포함해 57명이다 위안부 피해자는 1992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촉구' 수요시위를 21년째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미 한국 정부에 보상금을 지불했으니 피해자 개인의 보상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며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신대는 없다. 조선인 스스로 돈을 받고 몸을 판 것이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극우 일본인은 한국의 평화비 소녀상에 말뚝을 박는 등의 패륜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다.

 

<사할린 아리랑>은 사할린에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4만3천 명이 강제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토 다카시의 또 하나의 기록이다.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주장하며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일본은 패전과 동시에 조선인의 일본 국적 상실을 주장하며 강제 징용단한 6만여 명을 철수대상에서 적극적으로 제외시켰다.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등을 빼고 부녀자 포함 4만3천 명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그들의 귀환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있다. 그들은 조선인으로 일본과 조국 양쪽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이 책임을 갖고 우리들을 귀국시키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까지 우리들은 법률적으로 '일본사람'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온 1세대들은 사회 제도의 180도 전환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 내 눈 앞에서 정신이상으로 자살한 노인이 두 사람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은 조선 사람이 돌아갈 수 없었던 원인은, 38도선에 의한 조국의 분단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이념만 떠들지 말고 인도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저는 사할린의 조선사람을 일본으로부터도,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20세기의 버림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과거의 배상문제는 끝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할린의 우리들은 관계없는 일입니다. 왜 우리들이 조약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까요. -소련 사할린주 유지노사할린스크시 거주 자 증언-

 

귀국이 자유로워지자 일부는 연금과 생활 기반을 모두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그들에게 아무런 보상이나 생활대책을 세워주지 않아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다. 강제 연행 후 버림받은 사람들의 피맺힌 증언과 기록인 <사할린 아리랑>은 아직도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역사는 과거이면서 현재 이고 또한 미래의 그림자다. 기억되지 않는 과거의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전쟁 피해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생존자들은 자꾸 세상을 떠나는데 일본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커녕 교과서나 역사에서 범죄 사실을 지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대와 강제 징용 당해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은 국가에 의해 버림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한국이 정신대 문제나 사할린에 남겨진 사람들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른 척 하는 것은 일본의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태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나라가 함께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전쟁 피해 생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적절한 물질적 심리적 보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사할린 아리랑 - 카레이스키의 증언, 수레바퀴총서 2

이토 다카시, 눈빛(1997)


종군 위안부 - 자료집

김순호, 서문당(1993)


#종군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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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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