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주사파 뒤에 사노맹이 있고 그 뒤에 북한의 사노청과 김정일이 있다. 내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 (1994년 7월 18일 청와대 주최 대학총장 오찬모임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연일 최고 기온을 경신할 정도로 무더웠던 1994년의 여름은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이른바 '주사파 논쟁'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박 총장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확대·재생산되면서 그즈음 세상을 떠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조문 표시를 놓고 조성됐던 사상 검증의 칼바람을 부채질했다.
박 총장은 이후에도 폭탄 발언들을 이어갔다.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됐다" "1987년 이후 주사파가 1만5000여 명 이상 배출됐다" "종교계와 언론계 정치권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했고 일부 야당에 750명 정도가 암약 중이다" 등등.
특히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박홍 총장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학생운동 내 유사시 요인암살 등을 위한 테러조직이 구성돼 있다, 보안을 위해 점조직으로 구성된 이들은 폭력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완수를 위해 비밀훈련까지 받고 있다, 조직원을 포섭하기 위해 대학신입생들을 상대로 미인계까지 동원하고 있다"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이 200~300명 정도 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공안정국을 몰고 왔던 박 총장은 어떤 분명한 근거나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주장의 근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라든가,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말 한마디가 야기한 사상 검증 바람
하지만 그해 여름 한국의 실질적인 안기부장은 바로 박홍 총장이었다. 박 총장이 쏟아낸 발언을 근거로 공안당국의 수사가 이어졌다. 7~8월 두 달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120명을 넘어 섰고, 이 숫자는 그해 상반기 6개월간 같은 혐의로 구속된 사람의 숫자와 맞먹었다. 사상 검증의 화살은 학문의 영역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경상대 교양교재인 <한국사회의 이해>가 공안문제연구소로부터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고, 집필 교수들 가운데 네 명이 '빨갱이 교수'로 지목됐다. 보수 언론은 '붉은 교수 사실인가'(<중앙일보> 8월 4일) '계급혁명 가르친 교수들'(<한국일보> 8월 4일) '이적성 교재의 오류'(<동아일보> 8월 5일) '학문의 자유란 무엇인가'(<조선일보> 8월 5일) 등의 사설을 싣고 이들 교수들이 마치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친북 교수인 것처럼 매도했다.
검찰은 집필 교수들 중 장상환·정진상, 두 교수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들 교수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2005년 3월 11일 검사의 상고를 기각해 원심의 무죄 판결이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한국사회의 이해>의) 주된 내용이 한국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한 것이기는 하나 명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이 없고 피고인들이 학문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일환으로 제작한 것으로 학문과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두 교수들이 국가보안법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꼬박 11년의 세월이 걸렸고, 직위 해제와 복직이 되풀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장상환 교수는 지난 2008년 11월 28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김일성 장학금 받은 '붉은 교수'? 1994년 여름, 난데없이 유명인사가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재판과정이 지지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재판과정에서 검찰은 최대한 법원 판결이 미뤄지도록 지연 작전을 써서 검찰 명예가 덜 상하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1994년 11월 30일 기소된 후 6년이 지난 2000년 7월 24일에야 1심 재판에서 무죄선고가 나왔다. 1심 재판이 늦어진 이유는 검찰이 신청한 증인인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유동렬이 계속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유는 검찰이 빨리 무죄판결이 날 경우 검찰 명예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재판 지연작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자체 연구결과, RO는 최대 600명"... 매카시즘에 가깝다
박홍 전 총장의 발언으로 사상 검증의 광풍이 불었던 1994년의 여름으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는 예의 그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이 터진 이후 연일 공안당국은 확인되지 않은 범죄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 흘리면서 마녀사냥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에서는 자유민주연구학회 주최로 '내란음모, RO사건의 실체와 대책' 긴급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RO의 규모는 최대 6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석기 의원이 1993년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를 이끌 당시 조직원 규모가 최대 2000명에 이른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자체 연구결과 이 조직원들 가운데 20∼30%가 RO로 흡수된 것으로 파악됐다, 따라서 현 조직원 수가 최대 600명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바로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안보대책실 선임연구관이다. 그는 19년 전 <한국사회의 이해>를 '좌익 이적성 문건'으로 판단했던 장본인이다.
유 선임연구관은 세미나에서 "단순 계산으로만 600명이다, 20년이 지난 사정을 고려하면 더 많은 혁명 인자들이 유입돼 수천 명 규모로 증가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130명의 RO조직원으로 내란이 가능할까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러시아 혁명은 17명이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해 46명이 1억5000만 인구의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중국도 공산당원 195명이 5억4000만 인구의 중국을 공산화시켰으며, 쿠바혁명 성사 시에도 반군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세기 러시아와 중국·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이 과연 2013년의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 미뤄두더라도 "RO 조직원이 단순 계산으로만 600명"이라는 식의 주장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의 행태에 가깝다.
1950년 2월 9일,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휠링에서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며 "여기 205명 명단이 있다, 이들은 공산당원이라고 밝혀진 자들인데도 국무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종이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명단이라는 것은 완전한 허구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누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매카시즘의 쉬운 먹잇감이 됐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매카시는 그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지만 1만 명 가까운 미국인이 사상검증의 명목으로 직장을 잃거나 국외로 추방당했고, 1950년대 내내 미국사회는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불러온 증오와 공포의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석기 의원 둘러싼 논란,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다이석기 의원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또 내란음모를 실행할 조직으로 지목된 이른바 RO조직의 실체 여부는 사법부가 증거를 가지고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에서 나온 소수의 반대 또는 기권표 조차 종북으로 공격받고 정체를 드러내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대상에게 상식선의 반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은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달고 강물로 던져졌다. 무거운 돌을 몸에 묶었는데도 피고가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라고 판단해서 목숨을 빼았았다. 물속에 그대로 가라앉으면 피고는 죽음으로 혐의를 벗게 되는 것이다. 일단 마녀로 지목되면 살아남을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조적으로 비열하고 불공정한 재판이었던 것이다.
마녀사냥은 기독교 이외에 어떤 사상도 용납할 수 없었던 중세사회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마녀라는 낙인을 찍은 희생양을 통해 대리해소하는 동시에 마녀가 배제된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적 배제·통합기제로 사용됐다. 이런 측면에서 '종북'과 '주사파'에 대한 사냥을 부추기는 한국사회의 퇴행현상은 아주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