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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중반 현재 내 나이의 아버지와 엄마.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들의 큰 버팀목이었다.
 40대 중반 현재 내 나이의 아버지와 엄마.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들의 큰 버팀목이었다.
ⓒ 이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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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십대 이상 중년들이 어렸을 적, 집안에는 엄마와 아버지가 계셨다. 나이가 한참 들고 자식을 낳고 나서야 애들 보기 부끄러워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엄마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버지였다. 요즘 자식들에게야 아버지라는 말이 더 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아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한 번이라도 내뱉어본 내 또래의 아들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책임감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오는지 작은 단체의 회장이라도 해 본 이들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아버지는 바로 책임감이었다. 나락을 널어놓고 비가 올까봐 걱정하는 것도, 자식 대학 등록금 내는 날짜가 다가와도 걱정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의존하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서울을 가더라도 엄마는 아버지 뒤만 따라가면 되었다. 길을 모르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는 아버지 곁에만 있으면 제 장소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반드시 해냈다.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 중에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논 한마지기로 시작하여 자식 오남매 모두 대학을 마치게 했고, 집 한 칸씩 해주며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거기다 옛날 아버지들과는 달리 엄마를 끔찍이 여겼다.

동네 아낙들은 엄마를 보고 세상 걱정 하나 없이 살고 있다고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갈까 미리 걱정하기도 하였다. 금슬 좋은 부부 중 누군가 먼저 가면 남은 사람도 곧 따라간다면서. 엄마도 아버지 없는 삶을 생각하지 못했다.

"느그 엄마 잘 부탁해"

자식 대학 졸업식은 동시에 부모의 대학 졸업식이었다 요즘에는 부모들도 다들 대학을 나왔지만 예전엔 자식 졸업식 땐 부모들도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었었다.
▲ 자식 대학 졸업식은 동시에 부모의 대학 졸업식이었다 요즘에는 부모들도 다들 대학을 나왔지만 예전엔 자식 졸업식 땐 부모들도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었었다.
ⓒ 이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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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버지가 아프셨다. 반년을 모르핀에 의존하며 침대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물론 그 옆에는 늘 엄마가 함께 했다. 언제나 강했던 아버지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 설날 우리 5형제는 설을 쇠러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서울 대학 병원으로 모였다. 아버지는 작정하고 있었던 듯 우리 형제들을 침대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나도 피할 수 없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 올 줄은 몰랐다. 다른 집들을 보면 부모가 죽고 난 뒤 형제들 끼리 재산 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은 땅이지만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버지는 이 땅은 누구, 저 땅은 누구라며 형제들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이것이 바로 텔레비전 속에서나 볼 법한 유언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저렇게 이성적일 수 있을까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아버지는 의연하셨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리고 느그 엄마 잘 부탁한다"라고 하시며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아버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아버지의 유언은 온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누워계신 아버지 걱정보다는 홀로 남게 될 엄마 걱정이 더 앞섰다. 이런 자식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아버지 얼굴만 쳐다보고 계셨다.

아버지 없는 시골집에서 혼자 잠이나 잘 수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나쁜 생각을 하면 어떡할까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49재가 지나고서야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에게 독립을 선물했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났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까지 들어간 돈이 얼마라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아버지가 사용하였던 수첩에 기록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농약 값 등 농사자금으로 들어갈 돈을 적어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에게 건네면서 지었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칠십년을 살면서 한 번도 지어보지 못했던 자신감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어떤 개선장군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인생에 대한 강한 승부욕이라고나 할까! 엄마는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지자 어머니가 된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비로소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홀어머니'라는 말은 있어도 '홀엄마'라는 말이 없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엄마가 홀로 되는 순간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지 아닌가 싶다. 비록 엄마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독립국가 대한민국이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엄마도 곧 아버지 못지않은 인생의 선장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가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엄마가 이렇게 의연하게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 보다는 일찍 독립을 선언한 동네 아줌마들의 힘이 컸을 것이다. 동네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경로당은 할머니방과 할아버지 방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전세는 이미 역전이 되어있다. 할아버지 방에는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전사들이 제 몸도 제대로 겨누지 못한 채 누워있지만 할머니 방엔 신생 독립국 전사들이 혈기 왕성하게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 어엿한 여전사가 된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홀로 농사 진 마늘을 판 돈으로 올 추석에 다녀갈 손주 녀석들 용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작년 추석까진 아버지가 할 일이었다.

5년만 더 늦게 독립했으면...

대학병원 근처 식당에서 아버지, 엄마, 이모의 다정한 모습 우리들은 이날 외식이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가족외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 대학병원 근처 식당에서 아버지, 엄마, 이모의 다정한 모습 우리들은 이날 외식이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가족외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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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사람들은 3년은 지나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벗어난다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었다. 너희 엄마도 그럴 것이라며 자주 전화를 드리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7개월은 부모의 죽음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인 것 같다. 솔직히 바쁘다는 핑계로 혼자 계신 엄마에게 안부 전화 하는 것도 일주일 이상 거른 적이 여러 번이다. '정말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라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나도 나중에 내 자식들에게 당하겠지만.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과는 달랐다. 남은 자식들 앞에서 강한 척 하다가도 혼자서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막내 여동생이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가 큰 형에게 의지하려한다. 매주 시골집으로 형을 불러들이고 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큰 형에게서 채우려는 것일까. 

추석이 다가오자 엄마가 한 오년 만 더 있다가 독립을 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절이 다가와서야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슬퍼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올 추석엔 아버지에게 절하고 나서 보란 듯이 만세삼창을 불러야겠다. 엄마 독립 만세! 엄마 독립 만세! 엄마 독립 만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호남매일에도 송고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엄마#엄마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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