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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어떤 식으로든 그 노래를 탄생시킨 사회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괴로움이 노래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 중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과 고귀함이 동시에 치열하게 발현되는 공간은 바로 전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기획을 통해서 노래를 통해서 전쟁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따끔한 질책과 반론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상 : 호주 해군 군악대가 행진곡으로 편곡한 <왈칭 마틸다>)

식민지가 점차 확장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자치정부를 세운다는 목표 아래 1823년 식민지 의회의 창설을 승인합니다. 식민지 초기만 해도 호주 전역과 뉴질랜드를 포함한 광활한 영역이 뉴사우스웨일즈(NSW)라는 하나의 식민지였지만, 1890년에 이르면 호주는 뉴사우스웨일즈, 타스마니아, 빅토리아, 남부호주, 퀸즈랜드, 서부호주 등 6개의 독립된 식민지로 발전하게 되죠.

세계 여러 곳에 산재한 식민지를 방어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 지출을 해야 했던 영국 정부는 이들 식민지에 자치정부를 세워 국방을 스스로 담당하도록 요구했고, 호주에서는 1860년부터 영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해 1870년에 이르면 해군을 제외한 모든 영국군이 철수하게 됩니다. 반대로 호주는 이 시기 영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거의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병하는데요, 1884년의 수단 전쟁과 1899년 보어 전쟁에도 호주 군대가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죠. 

입대를 기다리는 자원자들 1914년 8월 호주군에 입대하려는 자원자들이 모병사무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대를 기다리는 자원자들1914년 8월 호주군에 입대하려는 자원자들이 모병사무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호주 보훈청

이후 1900년 7월 31일 국민투표를 거쳐, 이듬해 1월 1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호주 영연방국(Commonwealth of Australia)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호주는 국가로 탄생합니다. 하지만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해서 독자적인 국방과 외교권을 행사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호주에서 국방 분야가 자리 잡아 가는 것은 결국 독립 국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자, 호주 역시 영국정부의 결정을 지지하고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을 영국군 사령관의 지휘에 일임했습니다.

일부의 사회주의자들만이 왜 유럽의 전쟁에 호주가 뛰어들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만, 호주 전역에서 유럽에 보낼 군대의 모병과 훈련을 끝내고 항구를 떠날 때까지는 석 달의 시간이 걸렸을 뿐입니다. 1914년 11월, 유럽을 향해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군악대는 행진곡으로 편곡한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고, 호주 병사들은 "영국인들이여, 어려울 때는 언제든 도와줄 테니 술이나 한잔 사시오"라고 호기롭게 외치면서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영상 : 호주군과 함께 앤잭 군단을 구성했던 뉴질랜드 포병 악대가 연주하는 <왈칭 마틸다>)

영국군 사령관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호주와 뉴질랜드 병력은 두 나라의 앞 글자를 따 '앤잭'(ANZAC, Australia and New Zealand Army Corps)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앤잭 군단의 앞길에는 끔찍한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죠.

1915년 연합군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오스만 투르크(오늘날의 터키) 제국을 독일 측에서 떼어 놓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게 됩니다. 소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놓여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다는 대담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해군과 육군 사이에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음에도 양 군이 따로 별도의 계획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이 작전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영국 육군장관 키치너는 육군의 상륙·원정작전을 계획했지만, 해군장관을 맡고 있던 윈스턴 처칠은 우세한 연합군 해군력만으로 폭이 좁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 1915년 2월 영국은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해서 투르크를 독일측으로부터 뗴어 놓겠다는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갈리폴리 반도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한 축이었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1915년 2월 영국은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해서 투르크를 독일측으로부터 뗴어 놓겠다는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갈리폴리 반도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한 축이었습니다. ⓒ 호주 전쟁 기념관

먼저 실행된 것은 해군의 작전이었습니다. 1915년 2월 19일 공격을 개시한 영국과 프랑스 해군 함정들은 좁은 해협을 따라 배치된 투르크·독일군의 해안포대와 기뢰들을 개척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나아갔지만, 3월 18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기뢰에 접촉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영국·프랑스의 전함, 순양함 3척이 침몰하고 여러 척의 전투함들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게 되자 두 나라의 연합함대는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했죠. 이렇게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해군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는 해협의 한 축인 갈리폴리 반도에 강습 상륙한다는 육군의 작전이 실행되게 됩니다. 처음부터 수륙 합동작전이 고려되어야 했음에도 해군의 단독 작전이 실패하자 지상군의 투입을 결정한 것인데, 그 결과 전략적 기습의 기회는 잃어버리고 투르크 군에게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된 것이죠. 이 우매한 작전의 대가는 바로 병사들의 피였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것은 앤잭의 2개 사단과 인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영국군 제29사단, 왕립해군 사단, 프랑스 동방원정군단 소속의 2개 사단 등 총 6개 사단이었습니다. 상륙작전은 일찍부터 계획되긴 했지만, 영국군 지휘부는 상륙에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투르크군에 대한 정보조차 어두웠습니다. 심지어 작전장교들은 갈리폴리 지역에 대한 군사 지도조차 구할 수 없어 여행안내 책자를 참조할 지경이었습니다.

상륙작전은 처음부터 경험 부족과 장비 결함, 통신 두절, 보급 지원 악화 등의 산적한 문제를 안고 실행되었던 것이죠. 77척의 선박에 승선한 상륙군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을 출발한 것은 4월 3일, 하지만 기상이 좋지 않아 당초 23일로 예정되었던 상륙 작전은 25일에야 결행되었습니다(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매년 앤잭 병사들이 갈리폴리에 상륙했던 4월 25일을 '앤잭 데이'로 부르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연합군 해군이 철수하고 난 후, 한 달하고도 1주일이 지난 시간이었죠. 이 시간 동안 투르크군은 상륙이 예상되는 모든 해변의 위쪽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앤잭 소속의 2개 사단이 상륙한 해안은 어찌된 영문인지 당초 예정되었던 곳에서 북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바다를 면한 쪽을 제외하곤 삼면이 가파른 고지대로 둘러싸인 원형경기장 형태의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상륙 초기 이곳에서 투르크군의 반격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상륙군이 이렇게 불리한 지점으로 상륙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앤잭 군대가 상륙한 '앤잭만(灣)' 1915년 4월 25일 앤잭 소속의 2개 사단이 상륙한 '앤잭만(灣)은 삼면이 가파른 고지로 둘러 쌓인 최악의 상륙지였습니다.
앤잭 군대가 상륙한 '앤잭만(灣)'1915년 4월 25일 앤잭 소속의 2개 사단이 상륙한 '앤잭만(灣)은 삼면이 가파른 고지로 둘러 쌓인 최악의 상륙지였습니다. ⓒ 호주 보훈청

상륙지의 지형 자체가 최악이라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습니다. 앤잭 병사들은 가파른 능선을 '죽기 살기'로 올랐지만, 산마루 하나를 오르면 뒤에 더 높은 산마루가 가로막고 있었고, 무성한 덤불과 깊은 계곡에 가로막혀 상륙군은 좀처럼 전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곧 고지를 차지한 투르크군의 거센 반격에 직면하게 됩니다.

앤잭 병사들이 바글거리는 좁은 해안을 내려다보면서 투르크군은 포화와 총격을 집중했고, 곧 가파른 언덕은 죽은 병사들과 들것에 실려 해안으로 내려가는 부상자들의 행렬로 뒤덮였습니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계속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부상자가 내려가고 새로운 병력이 올라가는 장면은 매일 같이 되풀이될 뿐이었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내몰린 양떼들처럼 병사들은 죽어갔습니다. 부상자들을 후송할 병원선 대신 동물 수송용 선박을 써야했지만, 그마저도 부상병들을 돌볼 의사가 없어 수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또 비좁은 해안지대에 많은 병력이 밀집하면서 비위생적인 환경과 미처 매장하지 못한 수천 구의 시신을 뜯어 먹는 곤충들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는 여러 질병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앤잭 병사들은 자신들이 상륙한 좁은 교두보를 악착같이 지키고 있었죠.

갈리폴리 반도 터키의 유럽 지역에 길게 뻗어 나온 갈리폴리 반도는 서쪽으로는 에게 해, 동쪽으로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하고 있습니다. 지도 좌측에 앤잭 병사들이 상륙한 '앤잭 만(灣)', 영국군 29사단 등이 상륙했던 '헬레스 곶'이 보입니다.
갈리폴리 반도터키의 유럽 지역에 길게 뻗어 나온 갈리폴리 반도는 서쪽으로는 에게 해, 동쪽으로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하고 있습니다. 지도 좌측에 앤잭 병사들이 상륙한 '앤잭 만(灣)', 영국군 29사단 등이 상륙했던 '헬레스 곶'이 보입니다. ⓒ Gallipoli 100.com

5월이 되자 투르크군이 상륙군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벌였지만, 이번에는 앤잭 병사들의 치열한 방어전에 무릎을 꿇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나야했습니다. 앤잭 군단의 고전이 그들이 전투능력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지휘를 맡은 영국군 사령부의 총체적 무능에서 비롯되었다는 방증입니다.

또 앤잭 병사들과 대적하고 있던 투르크군 지휘관 중에 훗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대령 등 영민한 지휘관들이 많았던 것도 연합군에게는 불행이었습니다. 대령 계급으로 투르크군 제19사단을 지휘했던 케말은 직접 해안과 상륙지점에 나가 지형지물을 정찰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교두보를 돌파하려는 앤잭의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한 앤잭 병사들은 좁은 해변에서 사실상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연합군에게 불리해졌지만, 그렇다고 철수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것이죠.

8월이 되자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는 새로운 상륙작전이 앤잭 교두보 북쪽의 수블라만(灣)에서 실행됐지만, 마치 '휴일 날 산책을 나온 것 같은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이 시도 역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갈리폴리 반도 장악을 포기하고 철수를 택했는데, 12월 10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한 달 동안 단계별로 철수함으로써 갈리폴리 전투의 막은 내리게 됩니다.

8개월 동안 갈리폴리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연합군은 총 투입 병력 40만 명 중에 25만 명이 죽거나 다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투르크군의 피해도 얼추 비슷했지만, 당초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유리한 조건 아래 전투를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연합군에게는 치욕적인 패배였습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발생한 연합군 전사자 4만1000여 명 중 8587명이 호주군이었습니다. 

처음 단기간에 끝나리라고 예상했던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1차대전을 통틀어 호주군 사상자는 전체 호주 참전군인의 2/3인 6만 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호주 인구가 5백만 명 남짓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희생이었죠.

첫번째 '앤잭 데이' 1916년 4월 25일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린 첫번째 '앤잭 데이' 기념행사, 이후로 앤잭 데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호주 군인들을 추모하는 기념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첫번째 '앤잭 데이'1916년 4월 25일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린 첫번째 '앤잭 데이' 기념행사, 이후로 앤잭 데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호주 군인들을 추모하는 기념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 호주 보훈청

전쟁이 길어지면서 1916년 호주 정부는 강제징병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러한 결정은 호주사회에 엄청난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인종과 지역, 계층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지면서 전쟁 초기 호주를 휩쓸었던 영국에 대한 충성과 갈리폴리에서 앤잭 병사들이 보여주었던 용맹심과 자부심도 어디론가 사라졌죠. 1차대전에서 호주와 뉴질랜드가 얻은 것이 있다면 지구상에 이런 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팔, 다리를 잃고 불구가 되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로 귀국하는 병사들을 부두에서 맞이했던 것은 <왈칭 마틸다>의 선율이었습니다. 조국은 그들을 전쟁터로 보낼 때와 같은 노래로 병사들을 맞이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이 노래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만 불러일으킬 뿐이었습니다. 

노병들의 행진 매년 4월 25일 '앤잭 데이' 기념행사에는 참전 용사들의 행진이 벌어집니다. 지난 2008년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노병들의 시가행진 모습.
노병들의 행진매년 4월 25일 '앤잭 데이' 기념행사에는 참전 용사들의 행진이 벌어집니다. 지난 2008년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노병들의 시가행진 모습. ⓒ abc.net

갈리폴리에서 어린 병사들이 겪었던 끔찍한 전쟁 경험은 40여 년 후 한 포크송 가수에 의해 다시 조명받게 됩니다. 그는 영국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1969년 호주로 이민 온 싱어송라이터 에릭 보글(1944~)이었습니다. 에릭 보글은 어느 해 '앤잭 데이' 행사에서 <왈칭 마틸다>의 곡조에 맞춰 행진하는 어느 노병의 모습에서 전쟁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밴드가 연주하는 왈칭 마틸다에 발 맞추어 행진을 하면서 전쟁터로 향했던,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떠올렸고, 또 언제가는 행진을 할 수 없게 될 노병들을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1971년, 갈리폴리에서의 비극적인 경험을 간직한 어느 한 참전 노병의 읊조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고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네>(And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가 탄생하게 됩니다.

(영상 : 에릭 보글이 부르는 <그리고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네>)

"1915년에 조국은 나를 불렀네.
'아들아, 방황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그들은 내게 철모를 주고 총을 주고 전쟁터로 내보냈지.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네.
모두의 눈물 사이로, 깃발이 나부끼고 환호가 터졌고
우리는 갈리폴리로 향했다네.


(중략)

그들은 불구자와 부상자, 장애자들을 모아
호주로 다시 배를 태워 돌려보냈다네.
팔 없는 자들, 다리 없는 자들, 장님들, 미친 사람들
수블라만(灣)의 자랑스런 부상 영웅들
나는 내 다리가 있었던 자리를 살펴보았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 신께 감사드렸지.
비탄과 한탄, 그리고 애통함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그저 서서 바라보기만 했지.
그리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네.


(중략)

젊은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위해 행진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그리고 나 역시 스스로에게 똑같이 묻곤 한다네.


(중략)

왈칭 마틸다, 왈칭 마틸다
누구, 나랑 길동무 해줄 사람 없소?"


(영상 : 조안 바에즈가 부르는 <그리고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네>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에 대한 혐전(嫌戰) 분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탄생한 이 노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왈칭 마틸다>의 선율과 가사를 재해석한 이 곡은 지난 2001년 호주 음악공연협회가 선정한 '전 시기를 통틀어 호주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30곡'에 그 이름을 올렸고, 원작자 에릭 보글뿐 아니라 조안 바에즈 등 여러 가수들에 의해 불려 세계적인 반전가요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영국과 호주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의 현충일(Remembrance day, 영국과 캐나다는 1차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4월 25일)에는 붉은 양귀비꽃 조화로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곤 합니다. 선홍색의 꽃 색깔이 젊은 병사들이 흘렸을 피를 상징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터키 갈리폴리의 해변에도 꽃다발이 놓이곤 합니다. 호주의 광활한 대지를 자유롭게 방랑하던 젊은 병사들의 영혼은 지금도 갈리폴리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걸까요? 왈칭 마틸다의 가사를 나지막히 흥얼거리며 말입니다.

앤잭 추모비에 놓인 양귀비꽃 조화 갈리폴리 반도 앤잭만(灣)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추모비 앞에 양귀비꽃 조화가 놓여 있습니다.
앤잭 추모비에 놓인 양귀비꽃 조화갈리폴리 반도 앤잭만(灣)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추모비 앞에 양귀비꽃 조화가 놓여 있습니다. ⓒ 호주 보훈청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및 자료
정토웅(1997). 20세기 결전 30장면. 서울: 가람 기획
양승윤 외(1998). 호주·뉴질랜드.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매슈 휴즈 외(2008). 제1차 세계대전. 서울: 생각의 나무
존 키건(2009). 1차세계대전사. 서울: 청어람 미디어
피터 심킨스 외(2008).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서울: 플래닛 미디어
드와이트 존 짐머만(2011). 역사를 들썩인 전쟁 244장면. 서울: 현암사



#왈칭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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