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8일. 수능 시험장인 대구 경신고등학교에 도착했다. 평소 자식에게 애정 표현이라고는 전혀 없던 아버지가 차 안에서 응원까지 해주는 '놀라운 일'이 있었지만, 나는 긴장감도, 흥분감도, 설렘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10대의 끝자락에 와있음을 실감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 이후 교과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부에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도 했지만, 늘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지쳐가기만 했다. 특히 수학은 '영원한 나의 숙제'처럼 느껴졌다. 영어 역시 듣기가 전혀 안 되는 상태였다. 고등학교 생활 후반부로 올수록 야간자율학습을 '토끼는' 경우가 잦았고, '골치만 아픈' 교과 공부에 대해 환멸감 비슷한 것을 느낄 때도 많았다. 수능 시험 성적이 좋게 나올 리가 없음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었다.
차에서 내려 수능 시험장으로 들어가는데, 정문 앞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 몇 분과 마주쳤다. 선생님들은 "너 여기 왜 왔어?"라며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선생님들로선 그럴 법도 했다. 나는 이미 수시모집을 통해 서울의 한 사립대에 합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교과 공부 성적은 시원찮았지만, 당시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덕분이었다. 참 껄끄러운 사실이지만, 나는 MB정권 교육정책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서울 사립대-지방 국립대 동시 합격, 부러워했지만...
수능 한 달 전, 나는 면접을 보고자 서울을 찾았다. 그런데 당시 내게는 '합격'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원서를 내고 1차 서류 전형에 합격했으니 일단 면접을 보고자 상경하기는 했지만, 최종 합격한들 집안 형편상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면접시간도 고작 10분에 불과하니 몇 마디 나누고 나면 끝날 것이었다.
면접 시험장에 도착하니 내 수험 번호가 대기 명단 제일 위에 있었다. 수많은 면접대상자들 중 '첫 타자'였다. 기다릴 것 없이 빨리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장에 들어가선 면접관으로부터 "한 질문에 길게 답변한다"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10분이라는 면접 시간을 빨리 보내고자 한 질문에 대답을 길게 하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내 자신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대체 상식을 초월하는 저 입학금과 등록금을 어떻게 해결하며, 서울 어디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벽을 넘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각종 글쓰기 공모전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혹시라도 공모전에 당선돼 상금을 받을 수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순진한 생각임은 곧 드러났다. 응모한 공모전에서 줄줄이 탈락하고 말았다.
이런 속에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방의 국립대 수시 전형에도 원서를 냈다. 그리고 그 수능최저학력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수능 시험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수능최저학력 기준은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국어, 영어, 수학 중 한 과목이 3등급 이내에 들고, 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 중 2개가 3등급 이내에 들면 되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최저학력 기준을 통과해 지방 국립대에 합격했다.
'서울-지방' 차이가 왜 '격차'와 '차별'로 이어지나 이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황하고 있었다. 학교 측을 비롯한 주변 분들은 무조건 서울로 진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머니는 내심 지역에 남을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내적 갈등을 심하게 앓았다. 앞으로의 꿈을 위해서라면 한국 사회의 현실상 서울로 진학하는 것이 필요해보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역사학자가 꿈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역사 관계 학술단체나 기관, 그리고 역사 자료들은 서울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욕심이었다.
두 군데나 '합격'해 놓고도 '합격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현실이 참 야속했다. 또 '서울'과 '지방'이라는 '공간적 차이'가 왜 '격차'와 '차별'로 이어지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 구조만 없다면 나는 집안 형편에 알맞게, 그리고 주저 없이 지방 국립대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이와 함께 당시 스스로의 내면을 괴롭힌 점은 또 있었다. 사실 교과 성적이 형편없던 내가 비교적 쉽게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건, 논문 덕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국사에 관심이 많던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역사 관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끊임없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그 과정이 참 재미있었다. 학교 현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그게 좋았다. 또 당시 학교생활을 포함해 나를 힘들게만 하던 주변 상황은, 나를 한 가지에만 몰두하게끔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어설프게나마 역사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하던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내가 쓴 논문을 어느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것은 '문학소년'들이 자기가 쓴 글을 문학 잡지나 공모전에 투고하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덜컥 게재되었고, 화제 거리가 되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날 때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덕분에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 스스로에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자식과도 같은 논문과 글들을 팔아 대학에 합격한 것 아니냐고. 이런 생각이 맴돈 데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한몫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쓴 논문을 두고 '스펙'이라 칭했다. 당시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또 누군가는 내게 대학 입학을 '노리고' 논문을 썼느냐고 묻기도 했다.
언론 역시 그랬다. 나는 호평이건, 혹평이건 논문은 학문적으로 평가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언론들은 '현 정부가 시행한 입학사정관제의 최대 수혜자'라는 '홍보용 조명'만 들이댈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 합격 이후 몇 군데서 들어온 인터뷰 요청을 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와 관계된 것이면 모조리 '수단화'해버리고, 심지어 '스펙'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현실은 나를 서글프게 했고,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사회가 강요하는 논리 아닌 주체적으로 선택하길 이런 속에서 당시 이도저도 모든 게 싫었던 내 머릿속은, 차라리 재수를 할까, 아니면 방송통신대학교로 진학할까 등등 오만가지 상념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재수를 하자니 실력이 모자랐고, 방송통신대로 진학하자니 그곳엔 '사학과'가 없었다.
물론 내가 '합격의 혜택'을 누린 게 딱 하나 있었다. 최종 합격 이후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보충 수업과 자습 시간에 빠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지긋지긋한 학교를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전에 하교할 수 있었다. '집어 삼킬 수 없는 떡'보다 오히려 달콤하면서도 입안에서 저절로 녹는 '떡고물'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셈이다.
결국 나는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상경 이후 대학 생활은 솔직히 후회의 연속이었다. 스스로에게 맞지 않는 옷을 걸쳤다고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취업률과 언론 평가에만 매달리는 대학의 논리는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혹시 지금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진 이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논리에 나 자신처럼 휩쓸리지 말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게 우리 사회를 조금씩 바꿀 수 있는 실천적 선택이 될지도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 '입시가 뭐길래' 공모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