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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89학번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44살이다. 우리 또래는 참 애매한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가장 큰 걱정이었던 '스포츠 머리' 삭발은 전두환 전 대통령 덕분에 면할 수 있었고, 새까만 교복 또한 입지 않아도 되는 세대였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자유 덕분인지 70년 개띠들은 유난히 '발발'거렸다. 그래서 대부분 대학의 89학번 남자들은 '개팔구'라고 불렸다.

입시제도 또한 바뀌어서 먼저 대학을 선택한 다음에 지원 대학에 직접 가서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 전에는 학력고사를 본 다음 자신의 점수에 맞는 대학을 선택하면 됐지만, 우리들은 모의고사 점수만으로 대학을 선택하는 그야말로 복불복 세대였다. 그래서 89학번들은 자신들의 정확한 학력고사 점수를 모른다. 왜냐하면 대학들이 점수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기 대학 떨어지면 세상 끝... '개팔구' 세대의 추억

요즘이야 수시니 정시니 해서 최고 9번의 지원 기회가 있다지만, 당시에는 전기, 후기, 전문대로 나뉘어 딱 3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솔직히 3번의 기회라고 해도 실제적인 기회는 전기 대학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면 세상 끝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아마 내 또래 독자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알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어느 전자 회사의 광고 문구가 대학 선택 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이야기지만 친척들까지 동원되어 눈치작전을 하였고, 심지어는 학과 작성 란은 비워놓고 현장에서 경쟁률 낮은 과를 지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입시 정보 또한 두 군데 사설 기관에서 만든 대학배치표에 의존할 따름 이었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거의 공통의 배치표를 참고하였기 때문에 대학 및 학과의 순위는 이 두 사설 기관에서 정한다고 해도 맞는 사실이었다. 

모의고사 답안지에는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적는 란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지원했던 수험생들 중 자신의 순위를 나중에 점수와 함께 알 수 있었다. 개구쟁이 친구들은 이것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남학생들의 여대 지원이었다. 재미삼아 이화여대 영문과에 지원해 놓고 후에 결과를 보고 재미있어했다. '개팔구'들의 나름대로의 입시 추억이었다.

학과 상담 하러 갔다 담임 선생님에게 뒤통수를

학력고사 보기 한 달 전부터는 매주 모의고사를 보았다. 총 5번의 모의고사를 보고 점수에 맞는 대학과 학과를 찾았다. 여기서부터 담임 선생님과 전쟁이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5번 중 가장 낮은 점수가 실제 점수라 우기고, 학생은 가장 높은 점수가 자신의 점수라 주장하곤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승리는 담임선생님에게 돌아갔다.

단 한 번의 기회이기 때문에 소신 지원이나 배짱 지원은 엄두도 못낸 시기였다. 그리고 학과보다는 대학이 우선시되었다. 특히 인문계열은 더욱 그랬다. 어떤 공부를 하는 과인지도 모르면서 지원하는 시기였다. 판사가 되고 싶은 애들도 점수에 맞춰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지원하는 시기였으니 지원 동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원서 작성하기 며칠 전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꿈은 막연히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3 내내 국문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모의고사 볼 때마다 국문과를 지원해 보았다. 따라서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선생님께 "○○ 대학 국문과에 지원하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대학 또한 모의고사 점수와 배치표에 나와 있는 대학과 비슷하였기에 선생님이 동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통수를 때리시면서 말씀하셨다.

"야! 임마, 국문과 나와서 뭐 해먹고 살 건데?  작가 좋아하네, 실업자 될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영문과나 가. 영문과 나오면 밥은 안 굶고 살아.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할 테니 잔소리 말고 영문과나 써."

선생님은 그러면서 내가 원했던 대학보다 한 수 아래인 대학을 정해주셨다. 당시만 해도 영문과는 인문계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학과였다. 그래서 내가 원했던 대학의 영문과에 지원하기에는 내 모의고사 점수가 부족했던 것이었다.

또한 국문과 출신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국문과 나오면 다들 실업자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지금이야 논술학원이 성행해서 국문과 출신들의 몸값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말이다.

"선생님, 보세요. 저 영어 점수가 제일 낮아요. 영어가 제일 자신 없단 말이에요!"
"야 이놈아, 들어가면 다 하게 되어 있어.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고 쓰기나 해."

몇 번 우겨 보았지만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뿐 아니라 우리 반 대부분 학생들이 선생님께서 정해준 대로 원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독일어 과목을 가르치셨는데 항상 영어 과목에 대한 열등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유독 우리 반은 영문과에 지원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 영문과생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도 왠지 멋있어 보이고 졸업 후에 취직 걱정은 하지 않은 시기였다. 아무리 못해도 학원 하나 차리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 반 선생님은 다른 반 선생님들이 학과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의 장래를 더 걱정하셨던 것이다.

영문과 진학... 생계와 작가의 꿈 이루다

첫 칼럼집을 내다 영문과 재학 시절 배운 문학이론과 작품은 나의 글쓰기의 기초가 되었다. 생계와 작가의 꿈 둘다 이룬것 모두 고3 선생님 덕분이다.
첫 칼럼집을 내다영문과 재학 시절 배운 문학이론과 작품은 나의 글쓰기의 기초가 되었다. 생계와 작가의 꿈 둘다 이룬것 모두 고3 선생님 덕분이다. ⓒ 이혁제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느낀 점은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다 맞았다는 것이었다. 들어가기만 하면 다 따라 갈 수 있다는 말도 맞았고, 대학 졸업 후 지난 2년을 제외하고는 내내 영어를 가르치면서 호구를 해결하고 있으니 '영문과 나오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도 맞는 말이었다.
 
더욱더 좋은 것은 영문과가 단순히 영어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와 영미 문학을 동시에 공부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영어보다는 영미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문과가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지원했다고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여하튼 나는 영미 문학이론과 작품을 배우면서 글쓰기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은 아마추어이지만 나름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는 비민주적인 방식이 통용되는 시기였다. 선생님들의 손엔 늘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고 신고 있던 슬리퍼로 뺨을 맞아도 반항이라곤 상상도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자신들의 인생 진로조차도 선생님들의 손에 맡기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보다는 덜 외롭고, 덜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비록 80만이 넘는 또래들 중 20만도 못 되는 친구들만이 대학에 합격 할 수 있었지만 친구들끼리 노트도 빌려주고 모르는 문제는 1등에게 물어보면 가르쳐 주는 시기였다. 선생님께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로 맞아도 부모님들은 선생님 편을 들던 시기였다.

이런 믿음이 있던 시기였으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손해가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항로를 개척해 주신 고3 담임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입시가 뭐길래' 공모 응모글입니다.



#영문과 #국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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