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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개혁파 선비그룹인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하륜. 그는 보수파 수장인 이인임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개혁·보수 양대 세력과 동시에 어울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고려왕조 하에서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반대했다.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자 하륜은 정치무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과 맺어둔 인연 등이 유리하게 작용한 덕분에, 그는 조선 건국 이듬해에 정치무대에 복귀하여 이방원의 참모로 활약하게 된다.

관상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고려 멸망 직전에 열아홉 살 연하의 이방원에게 '코와 이마에서 제왕의 기운이 흐른다'는 점을 확신시켜준 적이 있다. 이것이 이방원과의 인연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하륜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관료 모습.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관료 모습. ⓒ 김종성
정계에 복귀한 하륜은 1398년에 이방원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때부터 태종 이방원이 하야하기 2년 전인 14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륜이 태종 정권 하에서 부귀영화의 첨단을 걸었다는 점은 그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또 하륜이 태종 시대의 거의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은, 그가 툭하면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 숱한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도 끝끝내 신변과 명예를 지킨 사실로부터 그가 태종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서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륜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관한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왕권과 관련된 정책들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건국 직후까지 도평의사사란 기구가 있었다. 신하들이 모여 국가의 최고정책을 결정하는 이 기구는 왕권을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이방원이 만든 정종 정권 하에서 하륜은 정부조직 개편을 지휘했다. 이때 그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꾸면서, 도평의사사가 갖고 있던 군사권을 의정부에 부여하지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최고정책결정 기구의 힘을 약화시킨 이 같은 조치는, 곧이어 등장할 태종 정권이 신하들의 간섭을 덜 받으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륜은 태종 집권기인 1414년에는 의정부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신설했다. 6개 행정부서의 수장인 판사들이 국정 현안을 주상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이 제도는 왕권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태종시대에 단행된 네 차례의 정부조직 개편 중에서 세 차례를 하륜이 주도한 사실에서도, 그가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참모인 정도전과 정반대로 왕권을 극대화하는 데에 치중했다. 정도전이 재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한 것과 달리, 하륜은 이방원의 뜻대로 주상의 정치적 주도권을 관찰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륜이 참모로서 장수한 둘째 비결은 어찌 보면 첫째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그가 주군의 의중을 사전에 확인할 뿐만 아니라 주군과의 상호 교감 속에서 자신의 책략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주군의 의견과 충돌할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일반적인 최고급 참모들이 스승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은 것과 달리, 그는 최고급 참모이면서도 보조자의 입장에서 책략을 내놓았다.  

연필로 책략을 썼던 하륜

그런 상황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륜은 자신의 책략이나 제안이 이방원의 비위에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의견을 내놓았다. 정도전이 자신의 책략을 '잉크'로 썼다면, 하륜은 전영록의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처럼 항상 '연필'로 책략을 썼다. 왜냐하면, 주군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깨끗이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민무구·민무질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방원은 왕비 민씨의 남동생들이자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의 외삼촌들인 민무구·민무질을 경계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이들이 외척의 지위를 악용해서 차기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핑계를 만들어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넣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복궁이 이성계·정도전이 만든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이방원·하륜이 만든 궁궐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복궁이 이성계·정도전이 만든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이방원·하륜이 만든 궁궐이다. ⓒ 김종성

이방원이 만든 핑계 중 하나가 태종 7년 7월 10일자(음력) 즉 1407년 8월 12일자(양력) <태종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미 여러 아들을 낳은 이방원이 하루는 처남 민무구에게 "임금한테는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좋을까?"라고 질문했다.

왕자가 많으면 왕위계승분쟁이 심할 테니 왕자가 하나뿐이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민무구는 "제가 이전에도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라며 동의를 표시했다. 왕자는 세자 하나로 족하다는 뜻이었다.

민무구의 발언은 그가 세자 이외의 왕자들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됐다. 민무구가 실제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가 왕실 자손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확대 해석된 것이다.

이 발언이 조정에 알려지고 정치쟁점으로 부각되자, 이방원은 최측근인 이숙번을 보내어 하륜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방원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 하륜의 의견을 구한 것은, 이방원이 사적 감정이 아닌 합리적 조언에 따라 민무구·민무질을 처벌했다는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방원은 진짜로 하륜의 의견이 궁금했던 게 아니라 하륜이 자기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륜은 이방원이 원치 않는 답변을 해버렸다. 태종 7년 7월 12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하륜은 이숙번에게 "가볍게 다루셔야죠"라고 답변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방원은 이숙번에게 "다시 가서 '경의 말은 안창후인 장우의 말과 같다'고 전해줘"라고 지시했다.

장우는 한나라 때 정승으로서, 눈치를 보느라 직언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신하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방원의 말은 '당신 지금 민씨 가문의 눈치를 보느냐?'라는 뜻이었다.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급 참모가 '가볍게 처벌하시라'고 조언한 마당에 그것을 무시하고 중한 처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민무구·민무질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하지만 이방원이 하륜에게 "경의 말은 안창후인 장우의 말과 같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관료들은 유배형이 이방원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관료들은 이방원에게 좀더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그러자 태종은 이런 분위기를 명분으로 민씨 형제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을 빼앗는 방법으로 압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하륜의 의견을 한번 더 확인했다. 이번에는 지신사(비서실장) 황희를 하륜에게 보냈다.

이번에도 하륜은 실수를 범하고 만다. 태종 7년 11월 11일자 즉 1407년 12월 10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이 황희를 통해 의견을 묻자 하륜은 "이 무리들이 세자를 제거하려 했다면 죄가 말할 수 없이 크겠지만,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니 죄가 그렇게 중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이번에도 가벼운 처벌을 제안한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방원은 황희에게 "다시 가서 '두 번 다시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말라'고 전해줘"라고 지시했다. 다시 황희의 방문을 받은 하륜은 땅에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살 길을 가르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륜은 그때서야 이방원이 민씨 형제에게 유배형 이상의 처벌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땅에 엎드려 두 손을 모은 상태에서 '주상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자기의 제안이 주군의 의중에 맞도록 수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연필'로 책략을 써야 했던 것이다. 

나이 어린 이방원을 하늘 같이 떠받든 이유

 조선시대 군주와 신하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군주와 신하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하륜과 이방원의 관계는, 만약 이방원이 열아홉 살 많았다면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륜이 열아홉 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륜이 이방원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왕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해도 일반적으로 참모들이 왕의 스승 같은 존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륜의 태도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하륜이 굴신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방원을 모신 데는 그의 참모 철학도 한몫을 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습적인 왕들 중에는 무능한 사람들도 있으므로, 훌륭한 재상이 왕을 보좌해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재상이 이끌어가는 대로 왕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거정이 왕명으로 편찬한 문집인 <동문선>에 실린 하륜의 글에 따르면, 하륜은 군주가 위에 있고 재상이 아래에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잘 협조하는 것을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인식했다. 하륜은 군신 간의 협조를 강조하면서도 군주 쪽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참모는 군주의 의중을 잘 헤아리고 군주의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륜이 나이 어린 이방원의 참모 역할을 하면서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방원의 능력에 대한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려 말에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제1차 왕자의 난이란 쿠데타도 지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선비와 무장의 자질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또 이방원은 상당히 잔혹하고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몽주를 적시에 암살하는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이성계 세력을 보호하고 조선 건국을 가능케 했다. 이런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기획력과 추진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참모가 없어도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륜이 이방원의 눈치를 살핀 데는 그런 점에 대한 고려도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륜은 자기보다 어리지만 자기 못지않게 유능한 주군을 모시려면 허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방원이 하륜을 끝까지 비호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방원은 하륜이 고려를 지키려 했다가 조선으로 얼른 돌아선 의리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또 그가 온갖 부정부패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방원 자신이 건재한 동안에는 하륜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하륜을 끝까지 살려주면서 최대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륜은 이성계-정도전이 구축한 조선왕조의 기틀을 허물고 이방원과 함께 새롭게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새롭게 세운 기틀의 상당부분은 정도전의 구상을 모방한 것이지만, 하륜이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적지 않은 역할을 했는데도 하륜이 후세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시대적인 소명을 고민하기보다는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보신형(型) 참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그의 인생철학 때문에 상당부분 빛을 잃고 말았다.

* 다음 기사에서는 태종 이방원의 여성 참모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집니다.


#참모열전#하륜#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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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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