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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드라마 <용의눈물>과 <대왕세종>에서 등장한 원경왕후(최명길 분).
KBS드라마 <용의눈물>과 <대왕세종>에서 등장한 원경왕후(최명길 분). ⓒ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은 하륜 같은 남자 참모뿐 아니라 여성 참모들에게도 적지 않게 의존했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는 여성 참모의 의견에 귀를 더 많이 기울였다. 그런 여성 참모 중 하나가 바로 원경왕후 민씨다.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 나온 원경왕후(최명길 분)의 인상적인 정치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이방원이 여성 측근을 중요시했다는 점은 왕이 된 뒤 후궁 권의빈(의빈 권씨)을 들이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가 원경왕후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권의빈을 들인 것은 권의빈이 어질고 지혜로운 여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감성지수(EQ)가 풍부해서 권의빈을 곁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방원은 여성의 정치적 보좌를 중시했다.

 

이방원이 여성의 정치적 도움에 의존한 것은 그의 주변에 마땅한 참모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에게는 하륜과 이숙번을 비롯한 적지 않은 참모들이 있었다. 그가 여성의 정치적 의견에 귀를 기울인 것은, 남자 참모한테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여성한테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경왕후 같은 여성이 참모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원에게 영향을 미친 '개경 작은 엄마'

 

원경왕후의 활동에 관해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이방원의 정치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준 또 다른 여인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방원은 이 여인이 자신의 정치 참모 혹은 후견인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 여인은 이방원이 자신의 정치적 수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바로 이방원의 '개경 작은엄마'인 신덕왕후 강씨다. 이방원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고향인 동북면에는 큰 부인을 두고 활동무대인 개경에는 작은 부인을 두고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뒤에 이방원은 신덕왕후와 원수가 됐다. 작은 엄마가 자기 몸에서 태어난 나이 어린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 이전만 해도 이방원과 신덕왕후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이방원은 작은 엄마를 자기 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다.

 

1388년에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에 최영이 이끄는 정부는 이성계 가족을 인질로 잡아두려고 했다. 이때 신덕왕후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태조실록> 머리말에 따르면,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정성껏 보살피면서 가문의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피신시켰다. 이방원은 불에 익힌 음식을 허리춤에 차고, 필요할 때마다 작은 엄마에게 주곤 했다.

 

1392년 조선 건국 직전에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자, 친어머니의 삼년상 때문에 동북면에 가 있었던 이방원을 급히 개경으로 불러 올린 인물은 신덕왕후였다. 신덕왕후가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이방원은 정몽주를 적시에 암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신덕왕후와 이방원은 정치적 동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문의 사활이 걸린 주요한 정치현안이 생기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곤 했다. 이 점은 <태조실록> 머리말에 나타난 두 사람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선 건국 전에, 반대파의 정치공세에 시달리던 이성계는 잠시 개경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마음을 굳건히 하라"며 이성계를 만류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전해들은 신덕왕후는 정도전이 이성계의 정계은퇴를 부추기고 있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정도전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이방원을 불러 "정도전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행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오해는 곧 풀렸다.  

 

어쩌면 이방원은 신덕왕후가 훗날 자기를 왕으로 밀어줄 거라는 기대감을 가졌는지 모른다. 조선이 세워진 뒤 신덕왕후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이 배신감을 느끼고 급기야 이방석을 죽인 사실을 보면,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수족으로 이용한 것인지,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정치 참모 혹은 후원자로 활용한 것인지 분명치 않은 이 관계는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깨지고 만다. 이후 이방원의 여성 참모로 부각된 이가 바로 원경왕후다.

 

 <용의 눈물>의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용의 눈물>의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 KBS

원경왕후는 고려 멸망 27년 전인 1365년에 명문가인 여흥 민씨 가문에서 민제의 딸로 출생했다. 숙종의 부인인 인현왕후와 고종의 부인인 명성왕후도 원경왕후와 같은 집안이었다. 장래에 원경왕후의 남편이 될 이방원은 2년 후인 1367년에 출생했다. 

 

원경왕후의 친가는 고려 말에 급부상한 개혁인 선비 그룹인 신진사대부의 일원이고, 외가는 친몽골(친원) 세력인 기황후 집안의 인척이었다. 친가는 신진 세력이고 외가는 구세력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에 비해 외갓집이 개인의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컸다. 외갓집이 공민왕 집권기에 파멸된 기황후 집안의 인척이라는 점은 원경왕후 남매들의 운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민제의 선택이 남매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의 국립대학 부총장인 성균관 사성 벼슬을 지내고 있었던 민제는 1382년(고려 멸망 10년 전)에 성균관에 입학한 이방원이란 신입생에게 주목했다.

 

민제는 이방원이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 주자인 이성계의 아들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민제는 이방원을 학생이 아닌 정치 파트너로 생각했다. 이때 원경왕후는 열여덟 살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살짝' 노처녀였다. 민제는 이방원을 가까이한 뒤 바로 그 해에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민제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집안은 신진사대부의 일원이고 처갓집은 구세력인 상태에서 신흥무인세력인 이성계와 사돈을 맺으면 어떤 환란이 닥치더라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 건국 이후 몇 년간은 그랬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었다. 이 점은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민제가 이방원에 주목한 까닭

 

 원경왕후와 이방원이 묻힌 헌릉. 왼쪽이 태종의 무덤,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무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원경왕후와 이방원이 묻힌 헌릉. 왼쪽이 태종의 무덤,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무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 김종성

원경왕후와 결혼한 이듬해인 1383년에 이방원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그는 이성계를 따라다니면서 정치현장을 경험했다. 원경왕후가 농후한 정치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과 원경왕후 가문이 정치변동에 민감한 집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경왕후가 이 시기에 젊은 이방원의 정치참모 역할을 했을 만도 하다. 만약 원경왕후가 이때부터 이방원의 참모 역할을 했다면, 작은 엄마에 대한 이방원의 의존도는 그만큼 약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전에는 원경왕후가 참모 역할을 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출산문제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딸 둘을 낳은 뒤인 스물네 살(1388년) 때부터 원경왕후는 세 번 연속으로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잃고 말았다. 그런 뒤에 태어난 장남이 서른두 살 때인 1394년(조선 건국 2년 뒤)에 낳은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원경왕후가 앞선 세 번의 경험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세상에 태어났다. 원경왕후가 비교적 안정적인 여건에서 출산한 아들은 서른세 살 때인 1397년에 낳은 충녕대군 즉 훗날의 세종대왕이었다.

 

어머니가 출산문제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세종은 왕이 된 뒤 여자 공노비(관노)의 출산 문제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기존에는 출산한 공노비에게 산후 7일의 휴가를 주었지만, 세종 12년 10월 19일자(음력) 즉 1430년 11월 4일자(양력)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산모에게 산전 30일 및 산후 100일의 휴가를 주었다. 나중에는 산모의 남편에게도 산후 30일의 휴가를 인정했다. 원경왕후의 경험이 세종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세종을 낳은 뒤부터 원경왕후는 정신적·육체적으로 가벼워졌다. 그가 출산의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로 인해 원경왕후는 남편의 정치활동을 보좌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시점은 이방원이 정권 실세인 정도전의 정치공세에 시달릴 때였다.

 

세종을 낳고 몸을 푼 원경왕후는 마음과 몸이 가벼워졌기 때문인지 '그라운드'를 펄펄 날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남편을 위한 '어시스트' 두 개를 기록한다. 그 어시스트 두 개는 이방원이 왕권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시스트를 받은 이방원은 두 번이나 골문을 흔들었고, 이것은 곧바로 대권의 향방을 결정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참모열전#원경왕후 민씨#이방원#신덕왕후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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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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