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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
때로는 일본에서
때로는 이북에서
때로는 삼랑진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
미인, 시인, 사무가, 농사꾼, 상인, 야소(耶蘇)이기도 한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인물

흰 쌀밥을 먹고 갔는데 보리알을 먹고 간 것 같고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찾던 만년필은
처의 백 속에 숨은 듯이 걸려 있고
말하자면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내 곁에 있고
우물도 사닥다리도 애아(愛兒)도 거만한 문패도
내가 범인이 되기 전에
(벌써 오래전에!)
범인의 것이 되어 있었고

그동안에도
그뒤에도 나의 시는 영원한 미완성이고
- 김수영의 시 <절망>(1962. 7. 23)

수영은 일본어에 익숙했다. 언젠가는 일본어로 일기를 쓴 적도 있었다. 폭발하듯 타오르던 혁명의 열기가 거의 완전히 사그라진, 그리하여 수영 스스로 망연히 "모두가 꿈이다"라고 읊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1961년 2월 10일이었다. 그 제법 긴 일본어 일기에서 수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형편없는 저능아이고 내 시는 모두가 쇼이고 거짓이다. 혁명도, 혁명을 지지하는 나도 모두 거짓이다. 단지 이 문장만이 '얼마간' 진실미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고독'으로부터 떨어져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일까. 지금 나는 이 내 방에 있으면서, 어딘가 먼 곳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향수인지 죽음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 것 속에서 살고 있다. 혹은 '일본말'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김수영 전집 2 산문>, 509쪽)

시인의 '횡설수설'은 계속된다. 그는 스스로 미쳐 있다고 말하면서, 안 미쳤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쓴다. '유언장'을 쓰는 기분으로 일기를 쓴다면서도, 단호하게 "난 살 테다!" 하고 끝을 맺는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혼란의 연속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절망>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의 분신인 듯한 그는 진정한 정체성이 없다. 그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1연 1행)이다. '일본'과 '이북' '삼랑진' 등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도처"에 출몰한다. '천 개의 손발을 가진 짐승'(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1연 5행)이다.

일기에서처럼, <절망>의 화자는 온통 혼동에 휩싸여 있다. 자신이 먹은 '쌀밥'은 어느 순간 '보리알'이 돼버린다. "피투성이가 되어 찾던 만년필은 / 처의 백 속에 숨은 듯이 걸려 있"(2연 2, 3행)다. 그러는 사이 그가 쓴 시는 "영원한 미완성"(3연 3행)의 바닥에서 헤맨다. '절망'하는 이유다. 갈피를 못 잡고 혼동하는 까닭이다.

시인에게 시는 그 자신이다. 시야말로 시인의 가장 명백한 존재 이유다. 그런데 그는 명확한 실체가 없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이기 때문이다. "미인, 시인, 사무가, 농사꾼, 상인, 야소(耶蘇; 예수-기자 주)"(1연 6행)이기 때문이다. 그중 어느 것이 진짜 그인가. 그는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자신인 시가 "영원한 미완성"인 이유다.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명백한 존재 이유를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영원히 그의 시의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예의 일기 속에서 수영이 또 다른 방식으로 적실하게 지적한 것처럼, "내 시는 모두가 쇼이고 거짓이"기에 말이다.

진짜 그럴까. 진짜 그의 시는 '쇼'이고 '거짓'일까. 그러니까 그의 삶은 말 그대로의 '절망'으로 가득찬 것일까. 아니다. 그는 말했다. 시는 미지의 정확성이며 후퇴 없는 영광이다. 정확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시를 쓴다. 시는 시인에게 "후퇴 없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원한 미완성"으로서의 '시'에 '절망'하는 수영의 모습은 결코 처연하지 않다. 반어적인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이유다. '절망'이라 쓰였지만 '희망'으로 읽는 이유다.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未知)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우인시(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 <김수영 전집 2 산문>, 253쪽)

"나의 시는 나도 모른다". 언뜻 무책임하고 오만한 말처럼 들린다. 자기도 모르는 시를 왜 쓰는가. 하지만 수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대로 말했다. 수영은 위 글의 앞머리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 장님'이라는 비유까지 썼다. 그 '장님'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고도 말했다.

사실, 자신의 시를 제대로 알고 쓰는 시인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그는 문학지나 신문에 실리는 시 월평(月評)의 필자들을 '새머리'로 조롱한다. 시를 가장 이해한다는 축들이 사실은 밤낮으로 어떻게 하면 시를 가장 합법적으로 독살할까 하고 회의를 연다면서 말이다.

그 자신도 모르는 시를 쓰는 수영이 원했던 시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시를 "영원한 미완성"이라고 말한 수영은 어떤 시를 쓰고 싶었을까.

"시의 예언성. 나는 사후 백년 후에 남을 시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끝난 후 반년 정도의 앞을 예언할 만한 시는 쓰고 싶다."(<김수영 전집 2 산문> 433쪽)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절망>,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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