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 한눈에
- 북한이 언론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보위부의 군사재판 모습과 결과를 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이 주도한 심화조 사건을 기억하는 탈북자들은 이런 연유로 장성택 숙청이 ‘제2의 심화조’ 사건으로 번지게 될 것을 우려한다.
- 그러나 공포로 유지되는 권력은 공포 정치의 원조인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증언하듯, 언제 어떻게 ‘인민의 원쑤’로 추락할지 모를 일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후견인이자 2인자였던 장성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북한 체제를 떠받치는 당-정-군 모두에 걸친 핵심 요직에서 해임된 지 나흘 만의 일이다. 재판은 단심(單審)이었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한 특별군사재판의 판결에는 증거주의와 방어권은 물론 심지어 변호인조차 없었다. 사실상의 전시 즉결처분을 연상케 한다.
사형 판결의 명목상 죄목은 '국가전복음모행위'였다. 그러나 역모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 그리고 시기조차 특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보다는 '놈'(장성택)이 김정은 제1비서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될 때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한 '불경죄'와 '괘씸죄'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수를 건성으로 쳤다고, 그래서 건방지다고 사람을 죽이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조카가 아저씨를 "개만도 못한 추악한 인간 쓰레기"라며 죽이는 패륜의 나라는 더 더욱 찾기 어렵다. 국가전복음모가 발각되었다면 오히려 몇 달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수사해서 일망타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안보 시스템이 작동하는 국가다. 결국 이 '피의 숙청'에 담긴 메시지는 '공포 정치를 통한 유일 지배체제의 강화'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의 '공포 정치'
'공포 정치'의 원조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시대의 자코뱅 과격파와 로베스피에르 독재다. 프랑스 혁명의 전염을 봉쇄하려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의 침입이라는 외환(外患)과 왕당파를 견제하려는 공화파의 내우(內憂)가 결속되어 프랑스 군중의 대학살을 초래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공포'는 '기요틴'(단두대)과 함께 정부의 공식적 도구로 등장했다.
혁명의 시대에 공포 정치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참수기계인 기요틴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한 시간에 30~40여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요틴으로 죽은 것은 아니었다. 파리 외곽의 어떤 사람들은 군도, 총검, 소총 등으로 살해되고 심지어 사슬에 묶인 채 대포에 맞아 처형되기도 했다.(<가면을 벗은 역사>, 시대의창, 165쪽)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하고 처절한 대량 학살자는 20세기의 사람들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공포정치는 지난 세기에 히틀러와 스탈린을 거쳐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전수됐다. 그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대량 살인자는 단연 히틀러와 스탈린이다.
독일의 나치는 실재하거나 혹은 상상 속의 '국가의 적'을 숙청하기 위해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를 만들었다. 게슈타포는 전체 국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기 위해 만든 도구였다. 히틀러의 책임을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를 제외하고 정적 처형과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한정할 경우, 학살은 수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피의 숙청'은 스탈린 시대에 완성됐다. 스탈린은 무자비한 탄압이 프롤레타리아 영구 투쟁의 일부라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산주의의 원리에 벗어난 '개인 숭배'를 조장하고 위성국가들에 '공개재판'을 전파했다. 스탈린 시대에 학살된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를 제외하고도 약 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박헌영 숙청과 장성택 숙청의 다른 점
김일성도 스탈린처럼 개인숭배와 우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숙청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는 남한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남로당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연안파를 숙청하고, 1960년대는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갑산파를 제거해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남로당계 박헌영 숙청은 1인 독재의 잠재적 위협인 '2인자'의 제거라는 점에서 장성택 숙청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박헌영 당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1953년 8월 체포되어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다. 북한 권력 2인자였던 그는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와 '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죄목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6·25 남침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계에 떠넘기고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은 정권도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에게 '국가전복음모' 혐의를 처형의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정은 1인 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8일 장성택을 체포한 지 나흘 만에 특별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형을 집행했다. 쿠데타 음모의 뿌리를 고구마 줄기처럼 캘 수 있는 데도 자백만 받고 '수괴'를 처형한 것 자체가 대중의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본보기 처형'임을 웅변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특별군사재판 장면과 판결문은 박헌영이 체포된 60년 전보다 더 후진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분노와 충격을 안겼다. 체념하듯 고개를 떨군 장성택에게 수갑을 채운 오른 손에는 고문의 흔적 같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장성택의 일체 범행은 심리과정에 100% 입증되고 피소자에 의하여 전적으로 시인되었다"는 확증은 고문이나 체념에 의한 조작임을 짐작케 한다.
김정은 정권은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했던 것처럼 정적을 제거할 때 단골 메뉴였던 '미제의 스파이'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공화국에) 많은 빚을 지게 하고,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며 장성택을 '매국노'로 규정했다. 그 무엇보다도 박헌영의 공개재판에는 선별된 청중들이 참석했지만 장성택의 군사재판에선 무표정한 법정서기 말고는 어떤 방청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일의 공포 정치, '심화조' 사건김정일 시대에는 이른바 심화조(深化組) 사건이 피의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의 대표적 사례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3년의 '유훈통치'가 끝나자마자 1997년부터 '심화조' 사건을 일으켜 피의 숙청와 공포 정치로 1인 지배권력을 공고화했다.
심화조 사건은 1997년 8월 전 당 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미국 간첩' 혐의로 평양에서 공개 처형되면서 시작됐다. 경찰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 수사발표에 의하면, 서관히는 6·25전쟁 시기 경력 중 조직생활에서 이탈한 한 달간 공백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 남한으로부터 간첩 임무와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회안전성은 나아가 6·25전쟁 당시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 요원들이 타격에 실패해 평양 용성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잡혔다는 이른바 '용성 사건'을 일으킨다.
두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주민 전체의 주민등록 문건 요해를 심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내 주민등록 문건부터 요해하라"는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든 사회안전성은 전국 수백 개 하부조직에 8000명의 '심화조' 조직을 만들어 6·25 전쟁 당시 간첩사건을 조작해내며 김일성 시대의 고위 인사들을 숙청했다. 당시 심화조는 무자비한 고문을 이용한 조사방식으로 1997년 말부터 4년간 숙청한 인사와 그 가족은 2만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생단 사건 |
'민생단 사건'이란, 해방 전 일제 비밀정보기관이 한인 공산주의 조직에 몇 명의 스파이를 침투시켰던 사건을 말한다. 초기에 곧 발각되고 소멸되었는데, '민생단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소문 때문에 서로 의심하고 죽인 끝에 그 희생자가 정말로 수천 명에 달했다는 사건이다. |
그러자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는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 변화와 그 부정적 실태를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했다. 김정일은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취지를 넘어 사회적인 불안과 반감이 전파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김정일은 심화조 해산과 동시에 사회안전성의 전횡과 고문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중앙당 조직부 검열과를 조직하고, 심화조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어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을 현대판 '민생단' 사건으로 규정짓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지시했다.
김정일은 전국 강연회에서 사회안전성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도록 했다. 이에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사회안전성 안전원들은 군복을 입고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심화조 소탕작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주모자로 지목된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등 네 사람은 현대판 반혁명종파분자로 처형되고, 전국의 '심화조' 소속 안전원 6000명은 출당 해임 및 수감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인민을 탄압하는 조직이 되지 말고 인민의 생명을 보안하는 조직이 되라는 의미로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성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대장에서 '원수'가 되지 못하고 '원쑤'로 추락한 장성택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북한 형법 제60조에 근거해 사형 판결을 받고 즉시 집행됐다. 북한 형법 60조는 '반국가적 목적으로 정변, 폭동, 시위, 습격에 참가하였거나 음모에 가담한 자는 5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특히 무거운 경우에는 무기 노동교화형 또는 사형 및 재산몰수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성택의 국가전복음모는 '정상이 특히 무거운 경우'에 해당된 셈이다.
2006년 10월 개정된 북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국가·반민족 범죄 사건의 수사는 '안전보위기관'이 담당한다. 형사소송법은 또 "군인, 인민보안원이 저지른 범죄사건, 군사기관의 종업원이 저지른 범죄사건은 군사재판소에서 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인민군 대장 계급이었던 장성택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장'은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당-정-군 조직 모두에 걸쳐 요직을 갖고 있던 장성택이 군에서 가진 유일한 지위(계급)이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의 문민인 그가 인민군 창건 행사에 군복을 입고 나오는 것도 '대장'이라는 지위에 근거한 것이다. 장성택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에 김정은이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받을 무렵에 대장 칭호를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대장 다음 계급은 차수, 원수, 대원수이다. 현재 살아 있는 원수는 대장에서 직행한 김정은과 항일 빨치산 활동 당시 김일성의 소년연락병이었던 이을설, 둘뿐이다. 북한에서 '원수'와 '원쑤'는 한 끗발 차이로 천당과 지옥을 가른다. 장성택은 대장에서 '원수'가 되지 못하고 '원쑤'로 추락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시대와 역사는 당과 혁명의 원쑤, 인민의 원쑤이며 극악한 조국반역자인 장성택의 치떨리는 죄상을 영원히 기록하고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언론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보위부의 군사재판 모습과 결과를 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이 주도한 심화조 사건을 기억하는 탈북자들은 이런 연유로 장성택 숙청이 '제2의 심화조' 사건으로 번지게 될 것을 우려한다.
김정일은 자기 친인척들을 냉정하게 자르고 숙청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토사구팽'이 된 심화조의 말로와 2인자 장성택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북한의 파워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파리 목숨'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기 마련이다. 공포로 유지되는 권력은 공포 정치의 원조인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증언하듯, 언제 어떻게 '인민의 원쑤'로 추락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