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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청바지를 입는데 엄지발가락이 가랑이 사이로 나오는 것이었다. 2009년 가을에 산 검은색 청바지였다. 살펴보니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두 개 나 있었다. 청바지가 닳아서 구멍이 나다니... 정말 나도 '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 하나 사야 되는 건가 하던 찰나 '아차'하고 떠오르는 건 통장. 자발적 실업자의 길을 걸으며 항상 안녕하지 못했던 건 내 마음보다 내 통장 잔고였다.

"한 번 피를 팔면 삼십오 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그렇게 많이는 못 벌지……"
- <허삼관매혈기> 중에서

지난해 11월 18일, 일자리를 찾다 눈에 들어온 광고가 하나 있었다. 생물학적 동등성시험(아래 생동성). 생동성은 시중에 시판되는 의약품과 이를 복제한 약을 비교해 비슷한 약효를 나타내는지 검증하기 위한 임상시험의 한 종류다. 2박 3일 두 번(2013년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25일부터 27일까지)에 48만 원, 넉 달에 걸쳐 4번(2박 3일)에 99만 원! '아하' 이거다 싶었다.

대학생들이 찾는 '꿀알바', 생동성 시험

      생물학적 동등성시험 참가동의서
생물학적 동등성시험 참가동의서 ⓒ 최명석

생동성 아르바이트(아래 알바)를 하기 위해서는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신장, 체중, 혈압, 맥박 등이 정상이어야 하고 약물을 복용해서는 안 된다. 시험 열흘 전 병원에 서른 명 가량의 남자들이 모였다. 모두 피를 팔기 위한 지원자들이었다. 간단한 신체검사를 하고 의사와 면담을 한 후 주의사항을 들었다. 그리고 생물학적 동등성시험 참가동의서에 서명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자네 눈을 좀 보자구.……. 없군. 자 혓바닥을 내밀어 봐. 위장 상태 좀 보게…. 아주 좋아. 됐어. 자네는 피를 팔아도 되겠어."
- <허삼관매혈기> 중에서

투약 전 일

   2박 3일 동안 머물게 될 병실
2박 3일 동안 머물게 될 병실 ⓒ 최명석

열흘 후, 내 피에는 이상이 없다는 문자를 받았다. 약속된 그 날이 왔다. 신경 써서 옷도 입고 머리도 하고, 처음으로 하는 생동성 시험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다. 책 두 권과 세면도구 등을 챙겨서 서울 관악구에 있는 한 종합병원 임상시험센터로 향했다.

오후 5시, 서른 명의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3~5ml 정도 피를 뽑았다. 첫 채혈이었다. 간호사는 지혈 방법, 시험 일정 등을 설명했다. 저녁 식사 이후로는 물만 마시라고 했다. 흡연은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여기 돼지간볶음 한 접시하고 황주 두 냥 가져 오라구. 황주는 따뜻하게 데워서 말이야."
- <허삼관매혈기>중에서

오후 7시, 저녁 식사로 병원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을 먹었다. 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것이 꿀알바구나' 노트북을 갖고 온 사람이 많았다. 피를 파는 지금 이 순간이 익숙한 듯 보였다. 간혹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동영상 강의를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피를 팔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투약 1일

 카테터를 팔에 꽂은 모습 카테터 (catheter): 체강 또는 내강이 있는 장기 내로 삽입하기위한 튜브형의 기구. 채혈이나 수액을 맞을 때 주로 사용한다.
카테터를 팔에 꽂은 모습카테터 (catheter): 체강 또는 내강이 있는 장기 내로 삽입하기위한 튜브형의 기구. 채혈이나 수액을 맞을 때 주로 사용한다. ⓒ 최명석

아침 5시 반. 기상 후 세수하고 혈압을 쟀다. 의사 한 명이 졸린 눈으로 앉아서 "다음", "다음"을 외친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고기처럼 우리는 돌아가며 아주 짧은 진찰을 받았다. 번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순서대로 채혈을 시작한다. 모두의 팔에는 카테터(관 모양 기구의 일반적 명칭)가 꽂힌다. 보통 헌혈이 400ml의 피를 뽑는데, 생동성 시험은 그보다 양이 적다.

이후 이것을 통해 13번의 채혈이 이뤄진다. 맨살이 아니기에 두렵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채혈은 최초 30분 간격에서 12시간 간격까지 늘어나고, 채혈 양은 한 번에 5~6ml 정도를 한다. 총 154ml 가량. 1기, 2기로 나눠 있으니 약 300~350ml의 피를 뽑는 셈이다. 보통 헌혈이 400ml의 피를 뽑으니 생동성에서 뽑는 양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계속 마셔서 배가 아플 때까지, 이뿌리가 시큰시큰할 때까지…. 물을 많이 마시면 몸 속 피의 양도 늘어나기 때문이지. 물이 핏속으로 들어가서…."
- <허삼관매혈기>중에서

오전 8시, 번호 순서대로 1분 간격으로 투약이 시작된다. 작은 약 한 알과 물 240ml를 모두 마셔야 한다. 하나도 남김 없이…. 이 뿌리가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많은 사람이 졸기 시작하는데 절대 자면 안 된다며 간호사들이 돌아다니며 깨운다. 그 사이 30분 간격으로 채혈은 계속되고 있다.

정오, 점심 식사와 함께 채혈 시간이 2시간 간격으로 길어진다. 오후 4시,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준다.

"피를 팔았는데 어지럽지는 않은가?", "어지럽지는 않은데, 힘이 없네요. 손발이 나른하고, 걸을 때는 떠다니는 것 같은 게…."
- <허삼관매혈기> 중에서

한 참가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체크하는 모양이었다. 고혈압약이라 그런지 혈압이 많이 떨어진 듯했다. 시험 도중 가끔 쓰러지는 참가자가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러운 기분이 들면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고 당부한다. 병원 바닥이 유난히 딱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순간적으로 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뇌진탕 등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

오후 8시, 그날 마지막 채혈을 하고 카테터를 제거한다. 다음 날 아침 마지막 채혈만 남겨둔 상태다.

투약 2일

 30분 간격으로 피를 뽑다가
30분 간격으로 피를 뽑다가 ⓒ 최명석

전날과 동일하게 아침에 일어나 혈압을 재고, 청진기를 든 의사를 만나고 채혈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후 12시간이 지난 오후 7시 반에 다시 모여서 채혈을 하게 된다. 투약 3일째, 아침 7시 반에 다시 병원으로 와서 채혈하게 되면 1기 일정이 모두 종료가 된다. 일 주일 후 2기 일정은 1기와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 <허삼관매혈기> 중에서

병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 병을 얻을 수 있어

생동성 시험은 신체에 불필요한 약을 투여하는 것이라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불면증, 구토 등의 가벼운 증세부터 심각한 수준까지. 개인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부작용 사례들이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업난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짧은 시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생동성시험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높은 인기다.

무분별한 시험 참여를 막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한 번 시험에 참가하게 되면 3개월 내에는 다시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아프지 않은 사람이 먹고 오히려 아파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하는, 그리 안녕하지 못한 일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다는 현실은 비극이다.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건지를 안 셈이죠… 피 흘려 번 돈은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
- <허삼관매혈기> 중에서

 생동성 시험 동안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다.
생동성 시험 동안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다. ⓒ 최명석

한 달 후, 피를 판 돈이 통장에 들어왔다.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냈다. 겨울이 다가와 급증한 가스 요금은 내 피 같은 돈을 금세 바닥나게 했다. '아차' 청바지 한 벌을 못 샀구나…. 피를 파는 것.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 달 후에 또 피를 팔아야 할까?

덧붙이는 글 | * 청춘 기자상 응모 기사입니다.
* 위화의 소설 <허삼관매혈기>를 인용했습니다.



#허삼관매혈기#생동성#생물학적동등성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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