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품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말
내 통치에 따르는 이들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선거가 종료되자 이내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는 밤새 이루어졌는데, 개표부정 또한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다. 새벽 시간엔 투표함이 대규모로 빼돌려졌지만 누구 하나 관심 두는 이가 없었다. 비는 다음 날 아침에야 그쳤고 해가 뿌옇게 떠올랐을 땐 천지간엔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새들마저 날기를 주저하는 시간, 피스 공식 게시판엔 먹바위 딸이 새로운 숲통령이 되었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먹바위 딸은 무엇이 급했던지 서둘러 총리와 숲장관들을 임명한 뒤 안개가 걷히기도 전 숲통령에 취임했다. 그녀는 아비가 만들어 놓은 먹바위 궁에서 만찬을 차려놓고 말했다.
"저를 믿고 피스를 맡겨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먹바위 딸 결코 숲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로 아버님께서 비명에 돌아가신지 서른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아버님께서 이루지 못한 피스식 민주주의와 새숲만들기운동을 기필코 완성해 내겠습니다. 또한 모든 숲민이 고루 잘 사는 피스가 아닌 우리의 뜻을 따르고 우리의 통치에 순응하는 자만이 잘 살 수 있는 선택적 경제를 실현하여 피스를 여러 숲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살기 좋은 숲으로 만들겠습니다. 그간 애써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선거 공약에 관한 것인데요. 선거라는 제도가 생겨 여러분이나 나나 마음에도 없는 공약을 많이 했지만 다들 공약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점 하나는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여 오늘부로 지난 선거 때의 모든 공약은 파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하시고 앞으로 펼쳐갈 제 통치를 믿어주고 또 충실하게 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그 소식을 들은 여우가 너구리 등과 함께 "먹바위 공주님 만세! 먹바위 아버지 각하 만세!"를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숲의 원로 격에 속하는 그들은 원숭이들이 피스를 강점한 시절 원숭이가 되고 싶어 원숭이 행세를 하며 동포들을 탄압하던 골수 친원파였다.
그들은 먹바위 아래에서 숲장관이나 숲귀족을 지내며 누구보다도 부정축재에 열을 올리던 자들로, 지금도 원숭이나라 술과 음식을 먹으며 원숭이나라 노래를 부르거나 원숭이나라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원숭이나라를 그리워했으며, 원숭이나라 숲민으로 살았던 일을 생에 최고 영예와 자랑으로 여겼다.
"이번 선거가 부정선거라네?"그러나 젊은 층의 생각은 그들과 크게 달랐다. 그들은 친원파 딸에다 독재자의 딸인 먹바위 딸이 숲통령에 당선된 것을 크게 못마땅해 했다.
"이런 망할, 숲통령에다 숲장관까지 친원파 일색이네?""정말 기도 안찬다. 숲민 등골이나 빼먹는 놈들이 다 숲장관이라니. 게다가 친원파에다 독재를 했던 먹바위 딸이 숲통령이 되었으니 먹바위 시절로 돌아갈 게 분명해.""그러게.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맞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애비한테 독재에다 숲민 죽이고 도둑질 하는 거 밖에 더 배웠겠어?""노루야, 그게 어디 도둑질뿐이겠어? 애비가 피스 최고의 난봉꾼이었으니 그 딸도 그렇지 않겠어?""하하, 그러네. 어쩜 아비의 기록을 곧 경신하겠구먼.""아, 피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정말 걱정이다. 걱정!"노루와 사슴이 진흙 목욕을 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때 토끼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느네들 소문 들었어?""무슨?"노루와 사슴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이번 선거에 엄청난 부정이 있었대."토끼의 말에 노루가 "부정? 에이, 그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시궁쥐도 거짓말로 숲통령이 되었잖아." 라며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진흙 밭을 굴렀다.
"이번엔 그 정도가 아니라 선거판 전체가 부정이었다는 거야. 우리가 투표한 투표함을 먹바위 딸 측에서 만든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거지.""선거 결과가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느릅나무 후손이 숲통령에서 떨어진 게로군,"사슴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지난번에도 있었잖어."노루가 말했다.
"아휴, 한 두 개가 아니라 지금 파악된 것만 해도 투표함을 절반이나 바꿔치기 했다고!""누가?""숲얼단이 그랬지 누가 그래. 놈들이 지금 원숭이마을에서 투표함을 몰래 태우고 있는데, 산비둘기 말로는 그 수가 엄청나대." "이런 나쁜 종자들을 봤나. 어서 가보자."사슴의 말에 노루가 "좋지!" 하며 따라나섰다. 한참을 달려 원숭이마을에 이르니 숲얼단 소속인 오소리와 들쥐가 외곽을 지키고 있었고, 토끼와 담비 등이 "선거부정 개표부정 먹바위 딸 물러가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숲얼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햐, 저놈들 배짱도 좋네. 백주대낮에 대놓고 불을 지르고 있구먼." 노루가 마을 위로 퍼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먹바위 딸이 숲통령에 취임했으니 겁날 것 없다는 거겠지." 어느 틈에 따라온 들개가 등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들개의 말이 맞아. 저들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사슴이 큰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먹바위 딸을 우습게보다간 큰 코 다친다. 아비의 복수를 위해 삼십년이나 이를 간 여자야.""들개야, 너야 말로 몸조심해. 언제 잡혀갈지 모르잖어.""괜찮아. 난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남는 불사신이잖아." 들개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독립군 후손인 그는 친원파를 제거하는 척살단 회원으로 그동안 척살단 이름으로 처단한 친원파만도 열일곱이나 되었다. 그 일로 친원파나 먹바위 지지자나 척살단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숲얼단 해체하고 먹바위 딸 물러나라!숲얼단과 시위대의 대치는 이틀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먹바위 딸이 대규모 부정선거를 통해 숲통령에 올랐다는 소문이 피스 전체로 번졌다. 투표함을 태운 곳도 원숭이 마을 한 곳이 아니라 숲 전체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자 시위대의 수가 점점 불어났고, 숲얼단 해체와 먹바위 딸의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시위대와 숲얼단의 대치가 이어지는 중에도 원숭이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시위대가 투표함을 내놓으라며 소리쳤지만 숲얼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는 날 시위대는 숲얼단을 밀어내고 원숭이 마을로 들어갔다. 서둘러 소각장으로 달려갔지만 투표함은 흔적도 없이 타버린 후였다. 시위대는 시신을 수습하듯 잿더미 속에서 타다만 투표용지 몇 장을 수습해 먹바위 딸이 있는 먹바위 궁으로 몰려갔다.
먹바위 궁에 도착했을 때 궁은 이미 궁수비대와 숲경찰 병력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궁으로 통하는 길이 막히자 시위대는 그 앞에 진을 치고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여러분 여길 보십시오. 우리가 투표한 투표용지가 이렇게 불태워졌습니다. 이는 피스의 법을 부정하는 중대한 범죄이자 내란죄입니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한 숲얼단은 당장 해체해야 할 것이고 단장인 늑대 또한 참수하여 숲 광장에 내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불어 부정선거로 숲통령에 오른 먹바위 딸은 부정선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지금 당장 숲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시위대를 이끄는 담비가 타다만 투표용지를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그러자 먹바위 궁 앞에 앉아 있던 시위대가 "숲얼단 해체하고 먹바위 딸 물러가라!" 라며 목청을 높였다. 시위대의 외침이 숲을 울리자 숲민들이 하나 둘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이번 선거가 부정선거라는구먼. 그럼 먹바위 딸은 어떻게 되는거야?""먹바위 딸이 어떤 여잔데 숲통령에서 물러나겠어?""허긴, 아비가 했던 짓을 봐도 그냥 물러나진 않겠어."광장에 나온 숲민들이 시위대를 지켜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때였다. 먹바위 궁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먹바위 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은옥이 1.2>,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으며, 청소년 역사테마소설 <벌레들> 공저로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