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겪는 '창살 없는 감옥'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표현을 여행 중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얼음으로 된 갑옷을 걸친 탑들로 이루어진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첫 야영은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비가 한창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수면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던 몇 시간의 밤을 보내고 나니 그토록 피곤한 몸이 벌떡 움직인다. 애써 웃음을 지어보려고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밖을 나와 보니 아침까지도 계속되는 비에 출발이 늦어진 여행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루에 15km를 걷지 못하면 이 '창살 없는 감옥'에 하루를 더 갇혀 있어야 하니 여행자의 마음은 급할 수밖에 없다. 강가에 냄비를 담궜다가 나도 모르게 놓칠 뻔했다. 준은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가방에 챙겨 든 와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대 방향에서 출발해 이제 탈출을 앞둔 여행자들에게 와인을 전했다. 겨울이 가지 않은, 아니 여름이 피해가는 이 곳에서 모닥불에 기타를 치며 와인을 마시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늠름하게 늘어선 설봉을 배경으로 젖은 텐트를 억지로 가방에 쑤셔 넣고 있자니 감각 대신 고통만 느껴지는 손가락을 아예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 비가 오면, 1분 1초가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 출발을 한 지 얼마 안 돼, 간밤의 추위가 악영향을 미친 것인지 준이 무릎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이대로 완주를 못하고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녀석의 얼굴은 금방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급한 대로 무거운 짐을 내 가방으로 옮겨 보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준의 붕대투혼에 감동한 것일까. 푸른하늘을 드러낸 토레스 델 파이네
 준의 붕대투혼에 감동한 것일까. 푸른하늘을 드러낸 토레스 델 파이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세상일은 참 재미있다. 포기를 눈앞에 둔 그 순간, 우리는 지나가는 여행자에게서 한 줌의 붕대를 얻었고 붕대를 감은 준은 그제야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흐린 먹구름은 온데간데 없고, 들판은 온통 풀냄새를 자아내며 따스한 봄날의 기운을 뿜어냈다. 어디선가 나타낸 한 무리의 말들이 길을 막고 풀을 뜯고 있을 때는 지구의 다른 어디론가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맑은 날의 토레스 델 파이네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옥빛 빙하호수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걷고 또 걸었다. 어깨를 옥죄어 오던 묵직한 배낭마저 기분이 좋았다. 3일치의 생명이 안전하게 들어 있으니 더 이상 잘못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겪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최고는 역시 여름이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겪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최고는 역시 여름이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한참을 걷다 넓게 펼쳐진 바위를 발견한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젖어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름이 피해갈 것만 같은 대자연의 뜨거운 태양은 밤새 얼어붙은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낯익은 얼굴의 여행자들이 하나 둘씩 지나치며 인사를 건넨다. 일단 이 대자연의 품에 들어오면 모두가 동지가 된다. 3박 4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잠깐씩 지나쳤을 뿐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잡은 여행자들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 소녀들을 가리켜 '아람단'이라고 불렀다. 학창시절 유행했던 청소년 체험학습에 참가할 때의 모습을 꼭닮은 소녀들은 미국에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이었다. 멀리서 큰 소리로 부르자 신나게 춤을 추며 응답하는 그녀들은 언제봐도 유쾌하다.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이토록 뜨거운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어쩌면 이것도 토레스 델 파이네가 부리는 마법일지도 모른다.

붕붕거리는 벌, 옹기종기 모여든 이름 모를 작은 동물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거짓말 같은 색감의 강까지 우리는 조금이라도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최대한 걷기로 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비경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맑은 해가 뜬 여름을 맞을 때다.

자연 앞에서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겸손함을 잃은 대가는...

거짓말 같은 색감을 가진 빙하호를 배경으로 지어진 쿠에르노 산장.
 거짓말 같은 색감을 가진 빙하호를 배경으로 지어진 쿠에르노 산장.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거짓말 같은 색깔의 호수는 산장의 맞은편까지 이어졌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 트레킹의 클라이맥스임을 직감했다. 쿠에르노 산장(Refugio Cuerno)에서 다시 만난 여행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제일 먼저 준의 다리 상태를 확인했다. 준의 무릎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온통 엽서 같은 풍경이 눈을 가득 채우던 빛나는 여름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다시 속도를 내고 걷다가 산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강인한 돌기둥처럼 오른편으로 계속 펼쳐져 있던 봉우리에는 어느새 인간의 접근을 막기 위한 어마어마한 먹구름이 서려 있다. 길가를 서성이던 동물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시원하던 바람은 싸늘해지나 싶더니 해가 질 무렵에는 칼에 베일 듯 날이 서 있었다.

다시 겨울이 오면, 공원안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다.
 다시 겨울이 오면, 공원안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만지고 싶도록 아름다운 색깔의 호수에 닿았을 때는 잿빛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그즈음 산이 또 한 번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짙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우리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회색 빛 구름과, 빛을 잃은 대지의 풀과 나무들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야영을 위한 캠프장까지 그저 걷는 것뿐이었고, 다행히 비가 뿌리기 전에 이탈리아노 캠프장(Campamento Italiano)에 도착해서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고, 화장실도, 하늘을 가릴 작은 공간 하나 없는 더럽고 으쓱한 야영장에서 준은 목숨을 걸고 냇가에서 겨우 물을 길어왔다. 진흙투성이가 된 그의 바지와 금세 새카매진 손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우리는 버너의 불에 얼어붙은 손을 던져 넣었다.

툭툭툭.

텐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겨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은 채, 마치 얼어붙은 고깃덩어리 같은 몸을 침낭에 구겨 넣고 밤을 맞았다. 과연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간간이 잠에서 깰 때마다 드는 생각은, 잠자는 것을 쉬고 싶었다. 쉬다가 다시 자고 싶은데 이탈리아노 캠프장에는 비는커녕 바람을 피할 공간도 없다. 좁은 벽과 벽 사이에 끼인 것 같은 텐트에서 두 번째 겪은 지독한 밤은 우리를 거의 실성하기 직전으로 몰고 갔다. 조금 가늘어졌을 뿐인 비를 뚫고 산 정상의 전망대까지 갈 것인가를 두고 서로 눈치싸움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운을 시험하기로 했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우리의 운은 결국 막을 내렸다.

짙은 안개에 파묻힌 프란세스 협곡.
 짙은 안개에 파묻힌 프란세스 협곡.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누군가에게는 빛나는 보석 같은 풍경을 선사했을 프란세스 전망대(Mirador Frances)는 짙은 안개에 삼켜졌다. 물이 불어난 계곡은 성인 남성도 삼킬 기세다. 더 깊이 들어갈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그저 주먹을 꽉 쥔 채, 온통 암벽으로 이루어진 등산로를 내려와야 했다.
계속되는 비는 미친 척 웃어넘길 여유마저 가져가 버렸다. 바짝 얼어서 움직이지도 않는 텐트를 바위로 부수다시피 으깨어 배낭에 넣었고,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바닥난 서로의 몸 상태가 두려웠던 우리는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한 여행자의 실수로 앞으로 수년간은 녹음을 볼 수 없게 됐다.
 한 여행자의 실수로 앞으로 수년간은 녹음을 볼 수 없게 됐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비는 그치지 않았고 풍경은 어느새 온통 불타버린 지옥의 모습으로 변했다. 올해 초 이스라엘의 한 여행자가 허가받지 않은 곳에서 불을 피우다 벌어진 화재로, 토레스 델 파이네는 W트레킹의 서쪽 절반을 모조리 잃었다. 녹음을 잃은 들판은 오로지 그림자 같은 잿더미였고 아직 자라지 못한 잔디는 아궁이와도 같은 그 땅을 채 덮기도 전이었다.

화재진압 시설이 전혀 없던 국립공원의 불을 끄기 위해 무려 1000km 가까이 떨어진 수도 산티아고에서 헬기가 날아왔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시간 산이 고통 받았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연 앞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겸손함을 잃은 대가는 산에도, 이곳을 찾은 여행자에게도 혹독했다. 내리는 비와 안개는 모두 산이 뿜어낸 분노였을까.

토레스 델 파이네의 서쪽 마지막 산장인 페오에.
 토레스 델 파이네의 서쪽 마지막 산장인 페오에.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페오에 산장(Refugio Pehoe)까지, 8km에 달하는 불타버린 대지를 쉬지 않고 걸어 도착한 우리는 야영비의 12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방을 구했다. 더 이상 야영을 했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4일만에 꿈결 같은 밤을 맞은 우리는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빠져나갈 보트를 기다리며 '아람단'을 비롯한 여러 여행자들과 마지막으로 서로의 추억을 나누었다.

다시 육지로 가는 보트위에서 지난 4일간의 여정을 복습할 수 있다.
 다시 육지로 가는 보트위에서 지난 4일간의 여정을 복습할 수 있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이윽고 멀리서 보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드디어 탈출이라는 짜릿한 느낌이 몸을 감싼다. 보트가 속력을 내고 물살을 가를 때 즈음, 그제야 산에 작별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갑판으로 나섰다. 어느새 다시 맑아진 하늘 아래, 3박 4일간 우리가 걸었던 모든 첨탑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불타버린 잿빛의 대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새하얀 설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이쯤 되면 너도 날 기억해줄까, 토레스 델 파이네. 그 혹독한 시기를 함께 보냈으니 말이다.


태그:#토레스델파이네, #W트레킹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