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역사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했다. 7일 전북 전주 상산고가 우편향 논란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을 포기했다. 같은 날 경기 파주 한민고 역시 재검토 입장을 밝혔다. 전날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교과서의 좌편향 사례를 언급한 데 이어 교육부가 20여개 고교에 교과서 선정 관련 특별조사를 하면서 분위기 반전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의 숫자는 극히 적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8종의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 이후,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취소를 두고 교육부와 야당·역사교육단체 간에 벌어진 역사전쟁의 결과는 명확해지고 있다. 교학사 살리기에 '올인'한 교육부의 완패라는 평가가 제기된다.
보수 정권이 집권 1년차에 역사 교과서를 고리로 한 역사 전쟁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이명박 정부 역시 집권 1년 차인 2008년 금성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좌파 교과서로 낙인 찍으면서 역사전쟁을 벌였다. 당시 사법부가 정부의 수정명령권이 가진 한계를 짚으면서, 정부의 패배로 끝났다.
보수 정권은 두 차례에 걸친 역사전쟁에서 쓴 맛을 봤다. 하지만 보수 세력이 역사교육을 통해 보수이념을 전파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역사 전쟁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차 역사전쟁] 금성교과서 '좌편향' 딱지... 사법부 '수정명령 부당' 판결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4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초·중·고등학교 사회·역사 교과서에서 반시장적·친노동적으로 서술한 오류 337건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좌편향 교과서 논란이 촉발됐다. 과거에도 경제·보수단체의 교과서 수정 요구가 있었지만, 10년 만에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교과서 수정 목소리는 더욱 노골화됐다.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바로 응답했다. 김도연 교과부 장관은 "현재의 교과서가 좌편향돼 있고 이에 따라 청소년들이 반미·반시장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면서 교과서 검토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통일부 등 정부부처도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고, 시도교육감들도 좌편향 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일선 학교를 지도하기로 했다.
금성 교과서는 보수 세력의 표적이 됐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이 "금성 교과서의 31개 항목 56개 표현이 좌편향 돼있다"면서 "개정판을 발행할 때 수정될 수 있도록 교과부에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9월 국정감사에서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금성출판사의 교과서와 북한의 교과서를 비교한 결과, 우리 역사 교과서는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역사서를 베껴 쓴 것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이에 안병만 교과부 장관은 "우리나라 근현대사 교과서에 정통성을 해치는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결국 교과부는 그해 11월 금성출판사 교과서 38곳, 다른 출판 교과서 17곳 등 55군데의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출판사는 교육부 명령을 받아들여 교과서를 수정했다. 하지만 저자들은 부당한 수정명령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저자들의 손을, 2심 재판부는 교과부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지난해 2월 대법원은 저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며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검정 절차에 준하는 새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1월 파기환송심에서 최종적으로 저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역사 전쟁은 보수 정권의 패배로 끝났다.
[2차 역사전쟁] 교학사 <한국사> 채택한 고교, 대부분 철회
박근혜 정부 들어 또 다시 역사전쟁이 벌어졌다. 2008년 좌편향 교과서 수정을 주도한 이후 서울 중곡초등학교장과 서울강서교육장으로 밀려났던 심은석 교육정책실장이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4월 다시 교육부로 복귀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권 관계자는 "청와대의 오더를 받고 교육부에서 역사전쟁을 준비한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해 8월 교과서포럼 출신의 이명희 공주대 교수 등이 쓴 교학사 교과서를 비롯해 8종의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며칠 뒤 '개국공신'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새누리당 의원 50여 명이 참석한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 창립식에서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겠다"며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와 유신 독재 탓에 곤욕을 겪은 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전쟁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교학사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와 비교해, 5·16과 유신 독재에 대한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데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후 야당과 역사학계는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교학사 교과서에서 수백 건의 오류와 부실이 드러나자,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 8종 전체를 대상으로 수정·보완 작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를 살리기 위해 다른 교과서를 걸고 넘어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수정명령을 받은 교학사를 제외한 6종 교과서 집필진이 수정명령 취소 소송을 낸 가운데, 교육부는 수정명령을 밀어붙였다. 지난해 12월 말 수정을 끝낸 8종의 교과서 2014년 전시본이 각 학교에 전달됐다. 하지만 학생·학부모·지역교육단체의 반발로 인해, 현재까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기로 한 곳은 한민고와 경북 청송여고가 '유이'한 것으로 보인다. 야당과 역사교육단체를 중심으로 박근혜 정부와 역사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포기할 수 없는 역사전쟁, 보수세력 반격하나?보수 정권이 집권 1년차에 역사전쟁을 벌인 이유는 뭘까? 보수 정권의 장기 집권 음모와 맞닿아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보수 정권이 향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수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친일, 쿠데타, 유신독재 등의 불가피성을 전파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의 유권자인 학생들을 우편향 교과서로 가르치려는 전략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2차 역사전쟁에서 연달한 패한 보수 정권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전체 고등학교의 10%는 1년 뒤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학교 중 일부가 1년 뒤 분위기가 바뀌면, 교육부의 엄호 속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꼼수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박근혜 정부가 보수사학자인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을 임명한 것도 향후 역사전쟁을 위한 포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역사 교과서의 검정을 맡은 만큼, 다음 검정 과정에서 역사 교과서 논란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정부는 또 다른 역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의 수장도 보수 성향 인사로 채웠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7일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권 입맛대로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의도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당시 검인정 교과서였던 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전환한 바 있다. 역사 교육을 독재 정당화 수단을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평가다.
향후 보수세력이 국정 교과서 전환 문제를 의제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반격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 역사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