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가족과 떨어져 수년 째 쪽방촌에서 생활을 해온 50대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주인을 대신해 밀린 월세를 받으러 간 동네주민이 숨져있는 이 남성을 발견했다. 이 주민은 "방 안에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냄새가 지독했다"고 했다. 쪽방촌에서는 이처럼 삶을 포기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고독사가 낯선 일이 아니다.
빈곤 가구의 마지막 잠자리인 쪽방의 역사는 6·25 전쟁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지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주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IMF 경제위기로 인해 노숙인 문제가 심화되면서 절대 빈곤층인 잠재적 노숙인의 집단 거주지로서 쪽방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대부분 쪽방촌은 큰 빌딩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동네 안으로 들어오면 40~50년 된 낡은 쪽방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낡은 쪽방 건물에 들어서면 좁은 복도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쪽방 문들이 줄서듯 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주거기준에 미달된 작은 방안에서 주민들은 불안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와 동자동사랑방,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은 이런 현실을 접하고 쪽방촌 주민들의 건강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2012년 '서울시 동자동 건강권 실태조사'를 수행하였다. 조사 결과 쪽방 주민의 건강이 한국인 평균에 비해 나쁜 것으로 나타났고 주민의 건강은 보건의료 서비스뿐 아니라 노동, 복지, 경제, 정치 등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사회경제적 요인이 개인의 건강행동 요인보다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쪽방 주민들의 건강문제를 이 사회가, 우리 이웃들이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서울 시민들이 모여 이들의 인권과 건강권에 대해 말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기획단'을 설립하고 지난 달 '건강권에 관한 서울 시민회의-서울시민, 건강권을 선언하다! 쪽방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아래 시민회의)'를 진행하였다.
시민 스스로 건강권의 기준을 만들다
이날 시민회의에는 나이, 성별, 연령을 고려해 선발된 서울시 거주 일반 시민 13명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선 2012년 쪽방촌 실태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이들과 함께 건강권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눴다.
기획단은 시민패널에게 공정한 토론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두 차례의 예비모임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선 여러 전문가의 발표와 쪽방 지역 방문, 쪽방 주민과의 대화가 이뤄졌다. 12월 13일과 12월 14일 본회의 이틀 동안 토론한 결과를 바탕으로 서울시 쪽방주민의 건강권에 관한 평가와 권고안을 도출하여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자리에서 시민패널들은 우리 사회에서 인권의 가치가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건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번 시민회의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모든 시민이 평등하고 함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였다.
최종선언문에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거나 급진적인 요구가 담기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더디고 우리가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지 않은가. 시민들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면서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성찰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한 시민패널은 "나의 건강할 권리와 쪽방 주민의 건강할 권리가 충돌되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쪽방주민의 건강권이 나의 건강권이고 곧 서울시민의 건강권이 모든 시민의 건강권인 것 같다"라고 이야기 하며 아래와 같은 개인권고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나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맛있고 깨끗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다. 나는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즐겁게 살고 싶다. 나는 배우고 싶다. 나는 즐겁게 일하고 싶다. 나는 쉬고 싶다. 나는 알고 싶다(나는 나의 권리와 의무, 새로운 정보 등을 알고 싶다. 나는 말하고 싶다(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알맞은 치료를 받고 싶다. 나는 서울 시민으로 인정받고 싶다. 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또 다른 시민패널은 "건강권이란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지지기반이 보장된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쪽방 주민들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번 시민회의는 시민 스스로 인권과 건강권의 기준과 내용을 만들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리로서 그 의미가 크다.
시민들이 현실의 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그 과정에서 평등하고 수평적인 의사결정을 경험하는 이런 시도는 더 많아져야 한다. 민주적 참여와 평등한 소통의 과정이 시민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니까.
아래는 시민패널들이 작성한 최종 선언문이다. 최종선언문 작성을 위한 모든 과정은 시민패널이 직접 진행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정숙 기자는 건강권서울시민회의 기획단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