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스승 태허진인이 무도의 궁극을 집약하고자 집필하였다는 무극진경은 사실 사대제자들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집필을 선언한 이후 태허진인은 제자와의 회합에서 더 이상 무도(武道)에 관해 논하거나 설이 없었다.

언젠가 제자 중 가장 강단이 있는 사제(四第) 담곤이 무학의 진전을 물었을 때, 진인은 곤아, 이것은 무학이 아니라 경(經)이다. 경은 무의 정리가 아니라 터득인지라 그 끝을 알 수가 없구나. 무공의 용(用)은 어느 정도 집약했으나 그 체(體)를 연결짓지 못하겠구나. 내공에서 기(氣)가 운행에만 그친다면 기는 다만 용에 머무르나 기가 체와 상응한다면 이는 이(理)에 도달한다. 나는 이(理)에 아직 도달하지 못하여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아직 경이라 일컫지 못하고 비급 정도로만 여겨다오.

진인은 그렇게 말을 아끼었으나 소리 없는 구름이 백리에 비를 뿌리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소문을 실은 바람이 만리를 오가는 강호에서는 무극진경에 대한 억측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대제자 외는 누구도 진인과 경에 대해 말을 나눈 적이 없건만 소문은 장강의 파도처럼 넘실넘실 강호인의 귀를 적셨다.

그 시절 무극진경의 완결본이 떠돌아다니네, 아직 초고일 뿐 절반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등, 진경에 관한 소문은 강호인들의 주안상에서 안줏감으로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소문도 세월 앞에서 이기지 못하는 법, 그렇게 말 많던 소문도 태허진인의 승천 소식과 함께 서서히 잦아졌다. 벌써 이십년도 지난 일이었다.

모충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무극요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소."
"흠,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대협은 태허진인의 수제자라고 알고 있소. 그런 당신이 무극진경의 요결조차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소."

무영객은 모충연의 귀에 바싹대고 속삭이듯 말을 했다.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아 첫째 제자로 칭해졌을 뿐 스승님은 무공의 성취를 따져 따로 수제자를 정하진 않았소."

모충연은 사대제자 중 자기가 가장 성격이 모나지 않아 기중 스승님이 속내를 많이 털어놓는 편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론 태허진인이 대협을 가장 좋아했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당신이 곁에서 가장 보필을 많이 했지. 그러니 대협이 모른다면 누가 알겠소."

무영객이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털어놓으라는 엄포를 말로 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도 하는구나, 모충연은 파고드는 통증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무극진경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소. 당신이 믿든 안 믿는 그건 진실이오."
"좋아, 그렇다고 쳐. 내가 원하는 건 초식 전개를 자세하게 적어놓은 비급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냐, 다만 전개 방향을 요약해 놓은 요결만이라도 내게 알려주면 돼!"

무영객이 유엽도를 잡은 손을 지그시 돌렸다. 번쩍, 알 수 없는 통증이 모충연의 혈에서 전신으로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버, 번쩍, 이번에는 연속 몇 차례 무언가가 전신을 훑었다.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하면서도 역겨웠다. 고통 이상의 고통이었다. 

"이 노옴, 네가 원하는 건 내가 알 수도 없고, 설령 알고 있다 한들 스승님의 유지를 이따위 고문으로 내가 발설할 것 같느냐?"

모충연도 폭발하고 말았다. 괴이한 통증이 전신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이 살수의 고문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만 깊은 의식 속에서 반짝거렸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요결이 없다면 태허진인이 대협과 헤어질 적에 선물로 준 그림이 있잖아. 그게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

무영객이 다소 부드럽게 나왔다. 이 늙은 대협에게는 고문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무영객은 요결보다는 그림의 행방을 묻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사실 이게 진짜 목적일지도 모른다. 큰 것을 요구하다가 작은 것으로 바뀌면 사람들은 쉽게 내어준다.  

"그, 그림은 진경과 무관하오."
"알고 있어. 요결이 안 되면 그림이라도 있어야 해."

모충연은 이 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준 그림이라고 해봤자 큰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사부님은 문파 해산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제자들에게는 각자의 길을 갈 것을 명했다. 석달 사이 둘째, 넷째, 셋째, 순으로 스승의 곁을 떠났다.

그때마다 사부님은 떠나는 제자에게 선물 하나씩을 주었다. 비단으로 싼 선물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었다. 사부님 또한 어디선가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 열어보라고 했다. 서로에게 비밀로 하라는 지시는 없었지만 제자들은 스승님이 자신에게만 특별히 준 징표로 생각하고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 각자도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으로 굳어졌다. 이십오 년 전의 일이다.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하는 모충연에게 스승님은 비단에 싼 선물을 주셨다. 이제 그만 떠나라는 뜻이다. 가로 한 자, 세로 석 자 크기의 네모반듯한 물건이다. 그가 정착해서 풀어보니 짐작한 것과 같이 그림이 있는 표구였다. 그림은 스승님이 직접 그린 것이고 여백에 시(詩)가 있으나 웬일인지 한 구절만 쓰여 있었다.

"그림은 칠 년 전 비영문 자헌당에 불이 날 때 소실되었소."

자헌당이라면 비영문의 장문인이 거처하는 곳이다. 칠 년 전 겨울 우연히 불이 나 건물 일부를 태운 적이 있었다. 무영객은 가만히 있다. 모충연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칠 년 전이라면 대협이 은퇴를 하고 난 뒤잖아. 스승님이 준 마지막 선물을 간직하지 않고 놓고 왔다고? 날 보고 그걸 믿으란 말이야?"

"스승님의 유품을 나의 개인적으로 귀물로 간직하기 보단 비영문 전체의 영광으로 남기고 싶어 차기 장문인에게 물려주고 온 거요. 결과적으로 더 안 좋게 됐지만."

"호오, 그렇게 소중한 귀물을 장문인이란 자가 불에 타도록 놔두었단 말이지, 이건 너무 순진한 변명이잖아. 일운상인답지 않아. 마지막으로 묻겠어. 그림의 행방은?"

무영객은 마지막을 강조하듯 싸늘하게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연재는 월, 수, 금, 주 3회 올립니다.



#무위도 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