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과 기황후는 정치적으로 긴밀한 사이였다. 물론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에서처럼 연인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정치적 관계였다. 이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황후가 충혜왕에게 약 주고 병 주는 관계였다. 병 주고 약 준 게 아니라 약 주고 병 준 관계였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이 기사를 읽어내려 가자.
참고로, 드라마 속 고려왕의 이름은 왕유이고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이지만,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점은 지난해 11월 29일자 기사(
죽은 아버지의 여자 건드린 아들... 자기 무덤 팠다)에서 이미 설명했다. 역사기록에 구애받지 않고 기황후와 충혜왕의 사랑 이야기를 창작할 목적으로 드라마 <기황후>에서 충혜왕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설명했다.
충혜왕은 열여섯 살 때인 1330년에 아버지 충숙왕으로부터 대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자기 쪽 사람들이 충혜왕 정권에서 소외되자 충숙왕은 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여 아들을 왕위에서 몰아냈다. 충숙왕이 몽골의 지원을 배경으로 아들을 실각시킨 때는 1332년이었다.
아버지한테 왕권을 빼앗긴 충혜왕은 몽골 수도 대도(지금의 북경 절반+그 위쪽)로 갔다. 그가 대도에 간 지 얼마 뒤인 1333년에 <기황후>에서 타환(지창욱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몽골 황제 토곤테무르가 등극했고, 뒤이어 궁녀 기씨(훗날의 기황후, 하지원 분)가 토곤테무르의 시녀로 발탁되었다.
몽골에서 충혜왕은 몽골 조정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와 별도로 그는 플레이보이의 삶을 사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다. 몽골인들이 망나니라고 부르며 혐오할 정도로 그는 여자를 몹시 밝혔다.
충혜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 두 가지<논어> 본문의 첫 구절인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를 엉뚱하게 이해했는지, 그는 밝은 덕이 아니라 예쁜 여자를 밝히는 데서 큰 배움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면서도 권력투쟁에 대한 집중력도 잃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는 문제아, 학교 안에서는 반장. 충혜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왕권을 빼앗긴 지 7년 뒤에 충혜왕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왕권을 회복했다. 때는 1339년, 충혜왕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가 왕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셋이다.
하나는 아버지 충숙왕이었다. 충숙왕은 살아생전에는 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였지만,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에게 왕권을 넘겨주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또 하나는 새롭게 몽골의 실권을 차지한 탈탈이었다. 그는 충혜왕의 왕권 회복을 지지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기황후였다. 기황후는 친정집인 기씨 가문을 통해 충혜왕의 복권을 도왔다.
이처럼 충혜왕은 왕위를 되찾는 과정에서 기황후의 도움도 크게 받았다. 이것은 충혜왕이 몽골에 있는 동안, 기황후의 신임을 받는 데 주력했음을 의미한다. 이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기황후가 충혜왕에게 '약'을 주는 관계였다.
복위에 성공한 충혜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자를 밝히는 일에 보통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그가 너무 좋아해서 그의 권위를 더욱 더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수입 상당부분을 사치와 방탕에 허비한 충혜왕
충혜왕은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반적인 왕들은 국가경제를 키운 다음에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는 방법으로 국가재정을 강화했다. 하지만 충혜왕은 왕이 직접 영리활동을 하는 방법으로 재정을 강화했다. 자신이 직접 무역 상단을 조직해서 돈을 벌었던 것이다.
또 충혜왕은 관료들에게 분배한 토지의 상당 부분을 회수하고 이것을 봉급제로 대체하는 방법으로 토지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다. 또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려는 특단의 노력도 없이 증세 정책을 강행하는 방법으로 재정수입을 늘렸다.
충혜왕의 재정정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진보적인 것이었다. 서민층뿐만 아니라 부유층에게도 증세를 강요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은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증세를 강행하고, 그렇게 해서 증가된 수입의 상당부분을 사치와 방탕에 허비했다.
충혜왕의 재정정책은 서민층의 반발도 초래했지만, 무엇보다 기씨 집안을 포함한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을 불러왔다. 결국 기씨 가문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층은 몽골을 상대로 충혜왕 탄핵운동을 벌였다.
기씨 집안이 탄핵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 집안의 정치적 수장인 기황후가 충혜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음을 의미한다. 기황후 입장에서는 자신의 도움으로 복위한 충혜왕이 자기 집안을 재정적으로 압박하는 데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충혜왕은 서른 살 때인 1344년에 두 번째로 왕위에서 추방됐다. 왕위에 복귀한 지 5년 만이었다. 두 번째 폐위 뒤에 그는 몽골로 압송되었다. 그는 수도인 대도에 머물지 않고 광동성(광뚱성, 홍콩 바로 옆)으로 유배를 떠났다.
나이 서른에 객사한 충혜왕, 그 이유는...<고려사> '충혜왕 세가'에 따르면, 충혜왕은 죄인들이 타는 수레를 타고 귀양지로 떠났다. 그런데 그를 태운 수레는 지나치게 과속으로 달렸다. 말을 타고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이상하리만치 과속을 냈던 것이다.
수레가 심하게 흔들리자 충혜왕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수레를 끄는 사람들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결국 충혜왕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호송 중에 사망했다. 수레의 속도는 그런 뒤에야 확 낮아졌다. 충혜왕은 이렇게 나이 서른에 객사하고 말았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의 끝부분에서는 충혜왕의 사망 원인을 놓고 독살을 당했다느니 귤을 잘못 먹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사인이 어쨌든 간에 고려 사회는 충혜왕의 죽음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다시 살게 되었다"며 환호성을 냈다.
충혜왕이 비참하게 객사한 본질적 원인은, 기황후를 중심으로 결집된 고려 기득권층이 충혜왕을 버렸기 때문이다. 기황후는 충혜왕에게 '약'을 준 지 5년 만에 '병'도 주었다. 결국 이 병으로 인해 충혜왕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충혜왕과 기황후의 관계는 기황후가 거의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관계였다. 기황후가 갑이고 충혜왕이 을인 관계였다. 드라마 속의 충혜왕과 기황후는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관계이지만, 실제 이 관계는 충혜왕이 기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는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