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안수찬 기자는 뉴스가 지겨웠다. 기자가 뉴스를 지겨워하다니 무슨 사연일까, 직무유기 아닌가. 하지만 그가 뉴스를 지겨워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4천원 인생>으로 친숙한 기획기사, '노동OTL'은 탄생하지 못했을 게다. 노동 현장의 비참함을 절절히 알려준 책 <4천원인생>은 안수찬 기자가 <한겨레21> 사회팀장으로 있던 시절, 기획기사로 쓴 '노동OTL'을 모아 엮은 것이다.
통계청이나 한국은행, 경제연구소들은 매년, 매분기 빈곤 수치들을 발표한다. 그리고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다. 아무리 뉴스에서 떠들어도 '빈곤'이나 '노동'에 대해 온전히 느끼는 이가 몇이나 될까.
몸에 와 닿지 않는 숫자들의 수명은 짧다. 인간의 땀과 눈물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이들의 절박함을 오롯이 숫자로 담아낼 수 있을까. 허상이다.
나에겐 출입처가 없었고 그들에겐 재력, 학력, 연줄, 건강, 의지 그리고 희망이 없었다. 출입처 중심의 속보 스트레이트 경쟁을 벌이는 기자들이 좀체 다가가지 못했던, 숨죽여 지내느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취재원들이었다.지난 5년여 동안 빈곤과 소외에 대한 취재에 골몰했다. 처음부터 특정 이슈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성 언론이 외면한 이슈와 영역을 깊이 들여다보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권력자·명망가 중심의 한국 언론 보도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누락된 영역이 있었다. 심층을 향하겠다는, 내러티브라는 새로운 장르로 그 심층을 드러내겠다는 구상은 하나의 길로 모였다. 사건에 착안하건 인물에 주목하건 공간을 파고들건, 깊이 들어가면 하나의 주제로 수렴됐다. 빈곤과 소외였다.(<뉴스가 지겨운 기자> 161~162쪽)기획기사 '노동OTL'은 철저하게 몸으로 부딪혀 만들어진 기사다. 현장으로 스며들었고, 체험했으며, 함께 부대꼈다. 기자들은 '식당 이모'로, '외국인 근로자의 동료'로 일했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들을 받아줬다. 노동의 가치를 일회용품처럼 여기는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신분 노출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따라서 굳이 기자임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생리통에 골반이 빠질 듯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당의 찬 바닥에 잠시 몸을 누이는 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손님이 없을 때, 동료가 망을 보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한 외국인 노동자는 자신이 출근할 때 꼬박꼬박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부인이 단속을 당할까 두려워서다. 기자가 "화재가 나면 어떡하냐"고 묻자,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라고 답했단다. 그래도 그의 문엔 자물쇠가 잊지 않고 걸렸다. 기자들이 현장에서 체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을 일들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 취재하는 일을 안 기자는 '내러티브 탐사보도'라 했다. 내러티브 탐사보도를 알기 위해선 대략적인 언론의 보도 행태 변화를 알아야 한다. 안 기자는 자신의 책 <뉴스가 지겨운 기자>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빈곤과 소외에 천착한 기자의 '내러티브 탐사보도'언론의 핵심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객관성'이다. 이는 '페니신문'과 관련이 있다. '페니신문' 이전의 언론은 소위 엘리트 언어가 난무해 여러 사람이 쉽게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1830년대가 지나면서, 1페니만 내면 누구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대중 신문의 시대가 열렸다. 따라서 기사가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작성됐다. 지금 부르는 '스트레이트' 기사의 시초다. 엘리트가 독점하던 정보와 지식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여기서 저자의 뜻이 곡해되지 않기 위해 첨언하자면, 심층보도와 대비되는 스트레이트가 옳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안 기자에 따르면, 다만 이 '격발의 언어(스트레이트)'는 '매일 매순간 동원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고 했다.
스트레이트는 이렇게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많이 바쁘시지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으시지요? 상관없어요. 저한테 3분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200자 원고지 8매 분량으로 현 정부가 어떤 비리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지 명쾌하게 알려드릴게요. 어때요. 놀랍지요? 분하시지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건가요?"(<뉴스가 지겨운 기자> 245쪽)그러다 100년 뒤, 선정언론에 대한 반성으로 다시금 객관성이 화두로 떠올랐다. 한결 같은 스트레이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론은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여기에 따른 흥미 위주, 추정보도에 대한 반성에서 뉴스의 신뢰도를 높이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다. 실명인용이나 삼각확인 등 객관성의 확보가 중요해졌다.
이런 객관성의 흐름 속에 '르포르타주' 시대가 열렸다. 기자들은 전쟁, 혁명, 빈곤의 공간으로 달려갔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기사에 옮겼다. 그러나 이런 르포의 황금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2차 대전 이후,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결국 1960년대부터 객관성을 넘어서려는 흐름이 생겼다. 상원의원이란 취재원도 결국 믿을 만하지 않음이 증명됐다. 따라서 검증이 필요했다. 예컨대, 검찰 등의 수사결과 발표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직접 끈질기게 추적해 그 죄를 입증해 보이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했다.
진실에 관한 한 최고의 장르는 언론이 돼야 한다언론은 법률이 아니라 정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실정법을 함부로 무시해선 곤란하겠지만, 법조문에 따라 취재 영역과 방식을 한정짓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중략)...잠입취재, 심지어 '함정취재'를 탐사보도 기법의 하나로 인정하는 서구 언론인들이 주의하는 것은 따로 있다. 우선 취재 과정을 투명하게 밝힌다. 잠입했다는 점을 제대로 밝히는 것이다. 아울러 취재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을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을 더 충격적으로 전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뉴스가 지겨운 기자> 125쪽)직접 취재에 나섰던 기자는 심층 내러티브가 스트레이트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탐사보도는 보다 능동적인 취재를 가능케 한다. 취재원의 입에만 의지하기 보단, 직접 몸으로 느낀다. 사진으로 전달 받지 않고 현장에 스며든다.
"그동안 우리 언론은 누군가의 말을 사실인 것으로 믿고 그에 근거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만 기사를 써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이 땀 냄새를 맡고, 그들의 말을 듣고, 때론 협업하면서 오감을 이용해 취재했다. '인용 전달'을 넘어 좀 더 객관적으로 기사를 쓸 수 있었다."(<뉴스가 지겨운 기자> 130쪽)3대 르포르타주로 꼽히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은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다. 문학적으로나 보도성격으로나 딱히 흠 잡을 데가 없다. 이토록 생명력이 긴 언론 보도가 또 있을까.
물론 책은 제대로 된 탐사보도를 위해 한국 언론이 뛰어넘어야 할 장벽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탐사보도가 힘든 뿌리 깊은 구조적 병폐를 안고 있다. 그러나 안 기자는 결론적으로 그 가능성을 결코 낮게 보진 않았다. 건전한 언론을 원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모인다면 한국의 언론 생태계는 보다 더 건강해질 것이다.
이미 인터넷과 SNS가 점령한 정보 시장에서 뉴스는 조금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새로운 사실'보다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을, 그리고 정치권력을 비롯한 여론주도층보다 많은 대중이 원하는 기사를 생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학과 과학을 뛰어넘어, 진실성에 관한한 최고의 장르는 '언론'이 돼야 한다"는 안 기자의 주장이 요원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뉴스가 지겨운 기자>, 안수찬 지음, 삼인 펴냄, 2013.12, 1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