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중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복도를 오갔다. 창문을 통해 교실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학부모 총회에 온 부모님들이었다. 나는 흘깃흘깃 곁눈질을 했다. 어느 순간, 시커멓게 탄 아버지 얼굴이 살짝 보였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께서 오시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말이다. 이미 나를 살핀 뒤여서였을까. 아버지께서는 교실을 두리번거리는 기색이 아니셨다. 오히려 흡족해 하시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랬을까.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담임 선생님께서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준다고 했을까. 난 지금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때는 전혀 말씀드리지 않았던 학부모 총회 일정을 왜 그때에는 그대로 전했는지 말이다. 어쨌든 나는 말씀드렸고, 아버지께서는 오셨다. 농삿일 핑계로 평생 한 번 오지 않던 학교에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이 드신 아버지 부끄러워한 기억쉬는 시간이 되었다.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부모님 찾는다고 복도를 오가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 후줄근한 옷차림을 한, 얼굴이 시커먼 아버지가 내 앞으로 불쑥 나타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친구들이 그런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게 창피했다.
아버지께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집으로 그냥 가신 걸까. 쉬는 시간에 밖으로라도 나가볼 걸 그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뒤늦었지만, 문득 아버지께 죄송스러웠다. 농삿일 다 제쳐 둔 채 오 리 길을 멀다 않고 오셨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구들이 안 봤으니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가 많으신 아버지께서는 아무래도 놀림감이 되기 딱 알맞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사달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어느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제 아버지를 창피하게 여긴 죄 많은 자식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어린 마음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있었다. 그때였다.
"은균아, 너는 왜 할아버지가 오셨어?"한 친구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벌떡 일어나 친구에게 몸을 날렸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했다. 친구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누가 됐든 코피께나 쏟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버지를 향한 죄스러운 마음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다시는 아버지께 그런 불경스러운 죄를 짓지 말아야지'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즈음 아버지께서는 회갑을 2년 정도 남겨 두고 계셨다. 친구로부터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나는 형제 일곱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이 마흔일곱 살, 어머니께서는 마흔한 살 때였다. 막내인 남동생은 나보다 더했다(?).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께서 각각 쉰 살, 마흔네 살 때 태어났다.
나와 남동생은 2차 베이비붐 세대(1968년~1974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에 속한다. 자식들을 많이 갖는 게 유행처럼 번진 시기였다. 부모들이 나이께나 들어 자식 낳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만 놓고 본다면, 아버지처럼 쉰 살 즈음에 연달아 자식을 갖는 경우는 그닥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놀린 친구 말을 듣고 지레 화를 낸 까닭이다.
우리 집은 최근 5년 사이에 둘째와 막둥이를 연달아 새 식구로 맞았다. 둘째는 내 나이 마흔 살에, 막둥이는 마흔두 살에 태어났다. 올해 녀석들은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네 살이 되었다. 아직 어리디 어리다. 이 녀석들을 보며 지레 걱정할 때가 있다. 내 '늙은' 나이 때문이다. 이 녀석들이, 지난날 제 늙은 아비를 부끄러워한 내 모습을 닮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과거의 업보라고 해야 하나.
내 나이 마흔 살에... 막둥이 고등학교 다닐 때를 그려본다나는 종종 가만히 나이를 가늠해 본다. 막둥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면 내 나이 쉰 살이 된다. 막둥이는 내가 퇴직할 무렵에서야 대학에 입학 할 나이가 된다. 막둥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를 미리 그려 본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 학교에 가면 녀석은 제 '늙은' 아비를 어떻게 볼까. 의젓한 여고생이 되어 있을 테니, 철없는 초딩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불경스러운 짓은 하지 않으려나.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다 치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는 중학생 시절이나 초등학교 때는 어떨까. "학교에 오려면 머리에 염색이라도 하고 오지 흰 머리로 그게 뭐냐"며 핀잔을 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상상하며 걱정하다 보면 짙은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자주 그럴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상 1979년의 나와 현재의 우리 집 자식들은 세대가 같지 않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방식도 서로가 분명 다를 것이다. 지난 날의 내가 그랬다고 지금 내 자식들이 그렇게 하리란 법이 없는 것이다. 나이 때문에 가끔 한숨을 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미래에 펼쳐질 상황을 낙관하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내 나이가 어때서'에 대한 평소의 확고한 신념('내 나이가 어때서 주의'라고 하자.) 때문이다. 평소 주변 지인이나 제자들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 상당히 친해진 상황을 전제로, 나이 한두 살 차이가 나는 지인에게 서로 자연스럽게 맞먹자고 먼저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나이 가지고 위엄을 세우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을 가장 싫어한다.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쥐뿔도 없으면서 나이와 경력 많은 것만 가지고 목에 힘 주는 '인간들'을 보면 솔직히 신랄하게 조롱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이가 벼슬이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하면서 말이다. 특히 나이와 경력을 내세우며 해야 할 일 하지 않거나 후배들에게 떠맡기다시피 하는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면상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그래서일까. '내 나이가 어때서 주의'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 적지 않다. 십여 년 전, 한창 결혼 준비로 바쁠 때였다.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설레고 기뻤다.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여느 20대 커플들 못지 않게 들떠 있었다. 바라고 바라던 결혼이었기에 말이다.
어느 날 또래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조언으로 도움을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우리는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맥줏집으로 향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맥주잔이 어지럽게 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기분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혼해서 애 키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맞아 맞아. 총각 때가 좋지. 낄낄낄.""정 선생아, 장가가자마자 애 빨리빨리 낳아서 얼른 키워 버려야 해. 네 나이가 벌써 몇이냐. 내일 모레가 마흔 아니냐. 잘 알았지?""결혼은 말이야, 해 보니까 되도록 일찍 하는 게 좋은 것 같더라고. 나이 들어 애 낳고 키우고 하는 일이 여간 힘들어야지 말이야."농담처럼, 혹은 사뭇 정색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냈다. 안다. 성스러운(?) 결혼에 무슨 재 뿌릴 마음으로 이런 말들을 했겠는가. 친구 같은 동료가 늦장가를 가게 됐으니 조금이라도 도움 줄 요량으로 뱉은 말들이었을 뿐이다. 설령 기분 나쁘게 들렸을지라도 속으로 '허허' 웃고 말면 되는 말들이었던 것이다. 아량 넓은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좀팽이 같은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넓은 마음으로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유난스레 그런 말을 자주 힘주어 뱉어 낸 한 동료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그냥 축하한다 해주고 말면 얼마나 좋아. 애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들고 벅차면 무엇 하러 장가 가서 그 고생을 한 거야? 그리고 내 나이가 어때서? 난 퇴직 후에도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생활이 여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때 자네는 아이들 다 키워버리고 무슨 재미로 살 텐가?"
웃으며 말한다고 했으나 말 밑에 깔린 가시까지는 완전히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조금 싸늘해져 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늦둥이 축하인사... "그게 대체 뭐야? 축하도 뭣도 아냐""다들 생각해서 하는 말들인 줄은 알아.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 들어야 말이지. 아예 그런 식으로 염장 지르듯 말하는 게 축하 인사의 전형처럼 돼버린 듯 싶어서 여간 기분 나쁜 게 아니야. 그게 대체 뭐야? 축하도 뭣도 아니지 않아?"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내쏘았다. 또래 동료들은 술김에도 내 말귀를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였다.
늦장가(?)를 간 덕분에 이런 일은 흔하게 마주친다. 삼 년 전, 막둥이가 태어났을 때였다. 며칠간 아내 산후조리를 하고 출근했다. 교무실에 있는 여러 선생님이 축하한다며 너나없이 덕담을 건네 주었다. 그중 한 선생님이 물으셨다.
"정 선생이 올해 몇이신가?""네, 우리 나이로 마흔둘이에요.""이번이 셋째?""네.""아이고, 언제 그 애들 다 키워 대학 보낸데. 정 선생이 힘 좀 들겠네."'쯧쯧'까지는 내뱉지 않았으나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힘들 때, 당신이 좀 도와 줄 테요?'하는 물음이 목구멍에까지 차올랐다. '애들 키워 대학 보내는 게 인생 목표라는 말이오?'하며 쏴주고 싶었다.
"언제 다 키우긴요. 100세 시대라고 그러잖아요. 환갑 지나봐야 고작 인생 절반 조금 더 산 것밖에 더 돼요? 그리고 축복 받고 태어난 자식인데 무슨 힘이 들어요. 저는 환갑 지나서도 아이 키우는 재미 느끼며 알콩달콩 살 거예요."'쓸데없는 걱정 마세요'하는 말은 안 했지만, 그런 투로 말을 끝맺었다. 머쓱해하던 그 선생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걱정해 준다며 한 말에 삐딱하게 쏘아붙인 내가 오히려 죄송스러웠다.
그럼에도 나이를 가지고 상대방을 걱정해 주는 건 정말 '아니올시다'이다. 어떤 나이에 어떤 특정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데 하나로 정해진 '정답'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평균'이나 '적령기' 같은 것이 있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그런 걸 강제하듯 하는 건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평균'이나 '적령기'는 지배적인 경향일 뿐 유일무이한 정답은 아니겠기에 말이다. '경향'을 '정답'처럼 들이대는 것은 경향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가 유난히 위력을 발휘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편에서는 나이를 벼슬처럼 여기며 휘두르다가도 다른 한편에서는 나이 먹은 걸 무슨 끔찍한 죄나 잘못처럼 여기기도 한다. '생(生)'에는 '애(涯; 끝, 물가, 가장자리)'가 있는 법이다. 나이 먹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나이 앞에, 세월 앞에 모두가 공평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이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오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 무슨 일을 해야 하니 말아야 하니 식의 정답이나 오답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스무 살은 피가 끓는 나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장년이나 노년의 신중함과 과묵함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칠십대 노인네라고 해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란 법은 없다. 여전히 자신의 짝과 분홍빛 사랑을 하고, 홀로 됐다면 피 끓는 이십대처럼 두근거리는 연애도 할 수 있다(해야 한다). 나이로 인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금기가 사라질 때, 대한민국이 진정 젊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