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버스는 잘 닦이지 않은 길 탓에 심하게 덜컹거렸다. 텀블링에라도 오른 듯, 온몸을 들었다 놨다 하는 2층 침대칸 버스에 누워 4시간여를 자니 우다이푸르에 도착했다. 더스틴은 경이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온몸이 들썩이는 가운데 어떻게 그렇게 평화롭게 잘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차에서라면 단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예민한 소녀였는데 말이지. 점점 터프해지는 나 자신이, 나도 무섭다.
우다이푸르의 인자한 피촐라 호수가 피로에 지친 우리를 맞았다. 잔잔함, 고요함, 평화로움.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다. 지난 한 달간 지나쳐 온 아그라, 바라나시, 자이푸르는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인도의 핵심 관광지이다.
인도에 온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필수 코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만큼 관광객으로 북적인다는 뜻이고 상인들의 호객 행위에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더러운 거리와 소음에 시달리고 걸인들의 구걸에 우울해지고 비정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골든 트라이앵글을 겨우 빠져나온 지금, 우리는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골든 트라이앵글, 인도의 핵심 관광지
놀고먹는 것 말고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만, 어쨌든 재충전이 필요했다. 시티 팔라스가 내려다보는 호숫가. 일광욕하는 느린 소들과 빨래하는 여인들. 한적한 풍경이 여기저기 채색된 우다이푸르는, 혼동과 소음에서 벗어나 평화를 즐기기에 적당한 도시인 듯했다.
숙소에서 한숨 늘어지게 잔 후, 바가지로 물을 받아 밀린 빨래를 했다. 콜카타와 바라나시에서 산 물이 잘 빠지는 싸구려 셔츠와 바지. 이제 그 물도 빠질 만큼 빠졌는지 빨아도 색이 나오지 않는다. 색이 빠져 선명함이 사라진 자리에 흐릿한 회색 물이 들었다. 찌든 때는 어쩔 수 없지. 나름 깨끗해진 빨랫감을 탈탈 털어, 우다이푸르의 햇살 아래 널었다. 지난 한 달간의 피로와 때가 싹 씻겨나간 듯 개운하다.
낮잠도 잤겠다, 빨래도 해치웠겠다. 지난 우여곡절과 생고생은 모두 잊고,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한 휴식을 취할 테다. 인도고 마살라고 다 잊어 버리고, 한적한 서양식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테다.
우리는 호숫가 입구 앞에 있는 독일식 베이커리로 갔다. 향기로운 차, 달콤한 케이크, 따뜻한 햇볕. 내가 찾던 삼박자다. 5루피(한화 약 100원)면 마실 수 있는 짜이지만, 오늘은 기분이니 무려 20루피(한화 약 400원)나 하는 고가의 짜이를 기꺼이 주문했다. 커피를 주문한 더스틴은 두 달 만에 처음 마셔보는 제대로 된 커피라며 기뻐했다. 짜이를 한 모금 마시니 온몸이 녹아내리듯 나긋나긋하다. 역시 돈을 준 만큼 받는 것인가. 북인도 최고의 짜이로 인정한다.
현지 식당보다 값이 조금 더 나가는 카페여서 그런지, 카페에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나는 여행자들 말고는 없었다. 배타적인 특권이란 게 이런 건가. 돈이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평화. 나는 잠시 골치 아픈 인도를 잊었다. 소똥 냄새도 잊고 마살라 따위도 잊었다. 평화롭다. 따뜻하고 달콤하다.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평화... 소똥 냄새, 마살라 따위 잊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길가 옆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은 것이 화근이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과 거리 사이는 작은 쇠사슬 하나로 경계가 표시되어 있었다. 쬐어오는 햇볕에 정수리가 따뜻해져 올 무렵. 익숙한 거리의 아이들이 하나, 둘 카페 근처로 다가왔다.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당신, 돈 있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비싼 짜이도 마시고 편안한 곳에서 휴식도 즐길 수 있겠죠. 나는 아니에요.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요. 지친다고 해서 당신처럼 돈을 주고 벗어날 수 없어요. 나는 매일 여기에서, 누구에게서라도, 무엇이라도 얻어내야 살아갈 수 있어요."말이 없는 아이의 눈빛이 말을 걸었다. 불쾌했다. 가난의 풍경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 이곳에 온 건데. 그들은 못 누리지만 나는 누릴 수 있는, 배타의 평화를 위해 돈을 내고 앉아 있는 건데. 걸인들이 구걸하도록 내버려 두는 카페에 화가 났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나. 쇠사슬 너머로 작은 손을 조금 내미는 것 말고는 없다. 아이들은 감히, 카페와 길 사이의 금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이 금을 넘어 카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점심을 먹고 잠시 들러 따뜻한 차와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아닌 나다. 거리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삶이, 구정물을 받아 마셔야 하는 삶이, 자신의 아이에게 구걸하라고 떠밀어야 하는 삶이 지친다고 해서, 편안한 카페에 앉아 잠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나다.
짜이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비린내 나는 진실 앞에 머리가 어질했다. 삶은 불공평하다는 진실. 가난함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아마도 평생, 구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풍족함 속에서 태어난 나와 더스틴은, 내가 왜 이 모든 것들을 가졌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많은 것들을 누리고, 소비하고, 탐욕하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너는 왜 내가 아닌지. 우리는 어찌하여 이런 각자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각자의 불공평을 이고 살아가는지. 서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며 살아가는지. 혹은 착취하는지도 모르고 착취당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 이 길고 짧은 시간을 지나갈 뿐이다.
아이들과 나 사이의 경계는, 그 옆을 지나는 인도 여인의 사리 색만큼이나 선명하다. 선명한 경계를 더 뚜렷이 하는 그들의 더러운 옷. 그리고 불쌍한 표정. 나를 향해 내미는 때 묻은 작은 손. 나는 불편하다. 불편한 그들의 삶을 외면하고 싶다. 잠시라도 잊고 싶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기차역 주위에는 상자와 천막으로 엉성하고 더러운 집을 지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거리의 구정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퍼서 달게 마시는 아이가 있다. 거리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가족이 있다.
잊고 있던 이들의 모습이 다시 가슴에서 우러나와 서로 부대낀다. 찌들은 가난의 모습이 내 셔츠에 절은 때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인도 밖에서의 가난이란, TV에 나온 가난한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다가, 채널을 돌리면 금세 잊을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었다. 채널만 돌리면 마치 그런 세계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 그런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늉하며 살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내 눈앞에 손을 내민 아이의 모습을, 없는 세계인 것처럼 여기고 차만 홀짝거릴 수 없다. 눈을 감아버릴 수도 없다.
구걸하는 아이에게 돈 쥐여주는 건...
몇 루피 쥐여주고 얼른 떠나 보낼까. 그게 나도, 아이도 원하는 일이다. 속이 다시 부대낀다. 구걸하는 아이에게 돈을 쥐여주는 건, 순간의 내 심기를 편하게 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일 수 있다. 지금 내가 쥐여준 돈 때문에, 아이들은 내일도, 모레도 거리로 나와 구걸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돈을 줘 봤자 아이 뒤에 숨은 조직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주지 말까. 나 하나 돈을 주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구걸을 멈출까. 구걸하지 않으면 다른 생계수단은 있을까.
나중이야 어떻든 지금 아이가 배를 곪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구걸하는 아이에게 돈을 주는 여행자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 생각이 없는 거야. 자기 마음만 잠시 편하려고 하는 거야. 다시 생각한다. 나의 이런 비난은 정당한가. 죄책감 때문에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닌가. 팔짱을 끼고 앉아 관조만 하는 내가, 생각 없이 돈을 주는 여행자보다 나을 건 뭔가.
비리지만,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작은 빵 조각 하나 얻을 수 있는 돈 한 푼 주지 않는 것. TV 채널을 돌리듯 아이의 인생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지 않는 것. 머리 아픈 일이지만, 세상이 애초에 불공평한 걸 나 혼자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뻔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만, 계속 고민하는 것. 불편하다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함부로 나보다 못한 삶이라 판단하지 않는 것, 동정하지 않는 것.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그게 다일까.
나는 단 한 번도, 한순간도, 내가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부모님이 소유한 집에서 살아본 일도 없으며, 부모님이 소유한 차를 타 본 적 없다.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아본 일도 없다. 되지 않는 장사와 빚에 시달리는 부모님의 시름을 들으며,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라왔다. 왜 조금 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원망도 종종 해 왔다.
엄마는 지금도, 한 번도 넉넉하게 살아보지 못한 결혼 후의 인생을 한탄한다.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지난 시간은 얼마나 우스운가. 나는 그렇게, 아이의 가난과 나의 가난을 비교하며, 저렇게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겁한 우월감을 느끼며, 아이가 그냥 돌아서 주기만을 기다렸다.
몇 분 후 아이는 체념하고 돌아갔다. 한참을 망설이던 난, 돈을 주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꺼진 듯, 알싸하게 쓰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