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팀 이승훈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
청와대의 공식 언론 브리핑은 두 곳에서 진행됩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 1층 로비에 마련된 '미니 기자회견장'이 있고 2층에는 규모가 큰 정식 기자회견장이 있습니다. 1층은 주로 현안에 대한 일상적 브리핑이 열리는데 반해, 2층에서는 인사 등 굵직한 사안들을 발표하는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이 열립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도 2층에서 열렸습니다.
그동안 춘추관에서는 2층보다는 1층 브리핑이 훨씬 많았는데요. 최근 들어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KBS 기자에서 청와대로 직행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민경욱 신임 대변인이 오고 난 후부터입니다.
[대변인 데뷔전] 쏟아진 기자들의 항의와 우려민 대변인은 인사 발표가 난 다음날인 6일 오전 첫 데뷔전을 치렀는데요. 남북이산가족 상봉 합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말씀'을 전달하는 브리핑이었습니다. 전체가 네 문장이었고 이 중 앞 세 문장은 '박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해 '말씀하셨습니다'로 끝났습니다. 첫 브리핑에 걸린 시간은 50초였습니다.
그런데 브리핑이 끝나고 기자들의 항의(?)가 쏟아졌습니다. 민 대변인이 과거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속도로 원고를 읽어버린 게 문제였습니다. 대변인의 말을 노트북으로 받아쳐야 하는 기자들의 손가락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습니다. '너무 빠르다', '받아칠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졌고 민 대변인은 다시 원고를 읽었습니다.
두 번째 브리핑은 같은 날 오후 7시에 있었습니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경질 발표였죠. 브리핑 전 기자들은 춘추관 직원들에게 '이번에는 좀 천천히 말해달라'고 사전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쪽에서는 "걱정하지 말라, 천천히 하는 연습도 했다"며 기자들을 안심시켰는데요. 이번에는 천천히 말할 새가 없었습니다.
민 대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문장,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잠시 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에 대한 정홍원 국무총리의 해임 건의를 받으시고, 윤진숙 장관을 해임 조치하셨습니다"였습니다. 브리핑을 마친 후 "이번은 괜찮았나요"라고 묻는 민 대변인에게 "빠르긴 했는데 짧아서 괜찮았다"는 답변이 돌아갔습니다.
이날 카메라 앞에서는 따로 질문도 받지 않았습니다. 해임 과정에 대한 질문은 마이크를 끈 후 진행된 백브리핑(자유로운 배경 설명)에서 쏟아졌는데요. 민 대변인의 대답은 "모른다", "거기까지는 확인 못한다"는 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언론인에서 대변인으로 변신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일까요. 민 대변인이 단순 전달자에 그쳤던 전임 대변인들의 전철을 밟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3일째] 취임 떡 돌린 대변인... "삼풍백화점 때 5시간 생방송한 사람"다음날인 7일, 민 대변인은 기자실에 '취임 떡'을 돌렸습니다. 민 대변인은 자신을 둘러싼 우려의 시선에 적극 해명을 했습니다.
그는 "발표 내용이 너무 짧다, 혹은 초 단위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사실 제가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5시간 생방송을 한 사람"이라며 "길게 이야기하려면 얼마든지 길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실수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라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길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좀 더 잘 하겠다", "제가 알려드렸으면 하는 게 있으면 공부해서 말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민 대변인에게는 '유행어'도 생겼습니다. "좋은 질문인데…"라는 말인데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민 대변인 입에서는 "좋은 질문인데"에 이어 바로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답변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제 기자들은 '좋은 질문인데'와 '답변 거부'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민 대변인은 "대답을 못해 주기 때문에 마땅히 할 말도 없고 미안해서"라고 설명을 하더군요.
[5일째] '열공' 돌입... 마술도 끊었다기자들에게 충실한 브리핑을 약속한 민 대변인은 현재 '열공' 중입니다. 또 기자들과 돌아가면서 식사 자리도 마련하는 등 스킨십 넓히기에도 나서고 있는데요.
특히 현직 기자에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바로 옮기면서 생긴 언론윤리 위반 논란을 의식한 듯 바짝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마술사를 자처하는 민 대변인은 기자 시절에는 술자리 등에서 마술을 선보이며 분위기를 띄우는데 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 대변인은 마술 한번 보고 싶다고 청해도 "앞으로 최소한 3개월 동안은 하지 않겠다"고 사양하고 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처음부터 너무 가벼워 보일까봐 걱정된다고 합니다.
민 대변인이 오고 난 후 청와대의 언론 브리핑은 세련되고 자연스러워졌다는 평이 많습니다. 민 대변인이 워낙 앵커를 오래 해서인지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자연스럽고 전달력도 뛰어나다는 평인데요. 브리핑 형식과 기술적인 면만 보자면 이정현 홍보수석의 '버럭' 브리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은 과거 정부에 비해 운신의 폭이 좁은 게 사실입니다. 김행 전 대변인도 제 역할을 할 공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이 때문에 새로 대변인을 선임하더라도 이정현 홍보수석은 물론 박 대통령이 신임 대변인이 자율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입'으로 불리긴 하지만 단순 전달자는 아니라는 점에서입니다. 전임 대변인들처럼 대통령의 말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역할만 맡길 거면 굳이 대변인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7일째] "고맙다"고 한 박 대통령... 대변인에 '박심' 실릴까물론 변화의 조짐은 있습니다. 이정현 수석이 해왔던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있던 백브리핑을 모두 민 대변인이 물려받아 진행하고 있는데요. 또 공식 브리핑도 대변인이 전담하고 있어서 이 수석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전임 대변인들에 비해서는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권한도 일부 커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청와대가 과거처럼 하려고 논란을 무릅쓰고 공영방송의 앵커를 영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요. 여기에 민 대변인 발탁은 박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인사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민 대변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고맙다"고 했다고 합니다. 민 대변인을 발탁하기까지 여러 현직 언론인 영입에 실패하면서 고심을 거듭해 온 청와대가 이번 인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인데요. 민 대변인에 대한 박 대통령의 기대도 꽤 높아 보입니다. 그만큼 과거 대변인들보다는 힘이 실릴 가능성도 있는데요.
전임 대변인과는 분명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민 대변인. "대국민 소통 증진"을 취임 일성으로 내걸었던 그가 지난 1년간 굳어져 버린 불통 구조를 바꿔낼 수 있을까요. 한 번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