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말만큼 많은 메타포를 숨긴 단어가 또 있을까. 정글 같은 사회에서는 '만만하다', 이성을 두고는 '별 매력이 없다'는 말에 최대한 예의를 갖춘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굴곡진 현대사를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말로와 그 후손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대는 원래부터 '착함'을 요구한 적이 없다. 본능으로 포장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생리를 충실히 이행하는 자만이 간택될 뿐이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는 데 전부를 건다. 숱한 비난과 상실 속에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때마다 그녀는 '그냥, 나도 모르겠어'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녀에게 착함은 본능이다.
선택적 상속이란 없어, 그분의 사랑을 완성해야 해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이사벨'은 아버지의 죽음 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새어머니 '캐서린'을 떠안는다. '캐서린'은 알콜중독자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골칫덩이다. 언니인 '마리온'과 형부 '톰'은 곤경에 빠진 이사벨을 방관한 채 그들이 가진 정치·종교적 헤게모니를 확장하는 데 여념이 없다. 이사벨은 캐서린으로 인해 연인 '어윈'과도 파경에 이르지만, 끝까지 그녀를 버리지 못하고 불안한 동거를 계속한다.
<은밀한 기쁨>은 수녀가 죽을 때 신을 만나는 희열을 이르는 종교적 용어다. 이사벨은 신을 믿지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껴안고 연인이 겨눈 총끝에 숨을 거둔다. 속인(俗人)이었던 이사벨이 거룩한 죽음으로써 성화(聖化)되는 순간이다. 그녀의 사인은 단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작품은 볼거리보다 읽을거리가 많은 연극이다. 드라마의 골격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지식하고 답답한 어떤 여자의 비명횡사다. 이사벨이 죽을 때까지 놓지 못했던 건 아버지의 부재로 상징되는, 사라져가는 전통적 가치관 같은 것들이다. 무엇을 지키고 실천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이사벨'의 속내를 읽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사람들은 같은 질문만 반복한다.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이사벨은 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이 캐서린이기 때문에 그녀를 받아들였다. 주위의 편견대로 캐서린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사벨 스스로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신을 상속받기 위해 캐서린이라는 빚을 함께 떠안았다. 이사벨에게 선택적 상속이란 없었으며, 그대로 행동하고 후회하지 않았다. 감히 그녀를 가리켜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비아냥댈 수 없는 엄숙한 이유다.
문제적 캐릭터들이 펼치는 이지(理智)의 줄타기
연극 <은밀한 기쁨> 속 캐릭터들은 저마다 뚜렷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마리온은 정치무대에서 우위를 점하는 여당 인사다. 톰은 말끝마다 주님을 찾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마리온이 이사벨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면, 톰은 이사벨을 위로하며 자신이 둘 사이의 다리가 돼주겠다고 약속한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결탁을 의미하지만, 작품은 노골적이거나 신랄한 비판보다는 그들의 철옹성 같은 논리가 어떻게 힘을 길러 왔고 얼마나 공고한지를 착실하게 보여준다. 교활하게도, 이들의 주장은 때때로 궤변이 아니라 꽤 그럴 듯한 항변처럼 들린다.
마리온과 톰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기성세대를 나타낸다면, 트러블메이커 캐서린은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에서 잉태된 달갑지 않은 산물이다. 어윈은 집착과 욕망을 사랑으로 포장하며 자신의 눈을 가리는 우중(愚衆)을 대변한다. 작품 초반, 아버지의 죽음으로 안전망을 상실한 캐서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설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어윈이 이사벨에게 끊임없이 진심을 요구하며 대치하는 장면은 가학적이기까지 하다.
김광보 연출가는 문제적 캐릭터들을 있는 그대로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텍스트 특성상 인물의 저의는 면밀히 해독하기 어렵지만 본질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사벨 역의 추상미는 오랜만에 돌아온 연극 무대에서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선보였다. 체념과 인내, 의지를 오가는 그의 감정선과 뉘앙스를 살린 대사 처리는 정통 지적(知的) 연극에 걸맞았다. 어윈 역의 이명행은 공간을 꽉 채우는 에너지와 집중력으로 스퍼트를 가했다.
마리온 역의 우현주는 극단 맨씨어터를 이끄는 수장답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캐릭터의 날카로움을 살렸다. 톰 역의 유연수는 농담 같은 진담, 진담 같은 농담을 매끄럽게 던지며 자칫 넘칠 수 있는 긴장감을 덜어냈다. 캐서린 역의 서정연은 화려함과 초라함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부드럽게 선보였다. 론다 역의 조한나는 지적이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호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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