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학교법인 운영권의 유상양도를 금지·처벌하는 입법자의 명시적 결단이 없는 이상 학교법인 운영권의 양도 및 그 양도대금의 수수 등으로 인하여 향후 학교법인의 기본재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거나 학교법인의 건전한 운영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추상적 위험성만으로 운영권 양도계약에 따른 양도대금 수수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나 형벌법규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지난 1월 대법원이 우리나라 사립학교 운영 체계의 근간을 뒤흔들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강원도 영월에서 사립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사학법인인 석정학원의 경영권을 16억5천만 원에 사고 판 혐의로 기소된 전·현직 이사장들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였던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사립학교법상 학교 매매를 금지하는 명시적 조항도 없고, 형사처벌 조항도 없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나 형벌법규 명확성의 원칙에 의해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로써 1심과 2심에서 학교를 사고 판 당사자들에게 각각 내려졌던 징역 1년과 추징금 8억2500만 원, 징역 1년 6개월과 추징금 9000만 원의 원심은 효력을 상실했다.
앞서 1심 법원인 춘천지법 영월지원과 2심인 춘천지법은 "대가(16억5천만 원)를 받고 학교 관리 운영권을 양도한 것은 영리법인의 대주주가 보유 주식을 양도한 것으로 비영리 재단법인 학교법인의 본질과 상충되어 부정한 청탁을 받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다.
학교 매매가 '부정한 청탁'에 해당하지 않는다니...
석정여중과 석정여고를 운영하던 석정학원 전 이사장인 양아무개씨는 학교 설립 이후 50년 동안 교장으로 지낸 남편과 함께 학교를 박아무개씨에게 팔았다. 양씨는 박씨로부터 2009년 이후 6회에 걸쳐 16억5000만 원을 받았고, 박씨는 그해 11월 거액을 지불한 대가로 이사장에 선출됐다.
이사장이 된 박씨는 2010년 2월 미술교사 채용 대가로 지원자의 아버지로부터 5000만 원을 받았다. 또 같은해 6월에는 행정실 직원으로 채용하는 대가로 지원자 어머니로부터 2000만 원을 수수했다. 그의 부정은 교사와 직원을 채용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박씨는 2010년 12월 교감으로부터 '교장으로 임용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 원을 받았다.
1심과 2심 법원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여 학교를 팔고 돈을 챙긴 전 이사장에게는 징역 1년과 추징금 8억2500만 원을, 돈을 주고 학교를 산 후 교사와 직원 채용의 대가로 거액을 챙긴 신임 이사장에게는 징역 1년 6개월과 추징금 9000만 원을 선고했다. 1심과 2심 재판부가 양 전 이사장에게 학교판매 금액의 절반을 추징금으로 선고한 이유는 함께 돈을 받았던 전 이사장의 남편이 2009년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법원의 무죄 파기환송으로 추징할 수 없게 돼버렸다.
"학교법인의 이사장 또는 사립학교경영자가 학교법인 운영권을 양도하고 양수인으로부터 양수인 측을 학교법인의 임원으로 선임해 주는 대가로 양도대금을 받기로 하는 내용의 '청탁'을 받았다 하더라도 ... 배임수재죄의 구성요건인 '부정한 청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나아가 학교법인의 이사장 또는 사립학교 경영자가 자신들이 출연한 재산을 회수하기 위하여 양도대금을 받았다거나 당해 학교법인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일정한 보조금을 지원받아 왔다는 등의 사정은 위와 같은 결론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이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의 일부다. 그러니까 돈을 대가로 한 학교 매매가 부정한 청탁에 해당하지 않으며, 이는 사립학교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국민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대법원의 판결현재 우리나라에는 100년 이상 된 학교부터 새로 생긴 사학들까지, 다양한 사립학교들이 있다. 초중등 공교육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 예산의 대부분이 학생 납입금과 국민혈세인 정부지원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다수 사립학교들에서 사학법인이 부담하는 학교운영비는 전체 예산의 1~2%에 그치고 있으며 이중에는 한 푼도 부담하지 않는 학교들도 있다. 법으로 정해진 법정부담금마저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채워지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물론 설립자 혼자서 재산을 출연해 학교를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지역 유지들이나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보태고 대표자를 내세워 세운 학교도 많았다. 더구나 설립 이후엔 교사들의 인건비뿐 아니라 건물 건축비, 창문이나 책걸상, 컴퓨터 등 기자재 구입에 대부분 국민 세금이 지원되는 게 현실이다. 무늬와 이름만 사립학교지 실제 운영은 국민 혈세로 이뤄지는 공립학교와 거의 같다는 뜻이다.
이렇게 학생들의 납입금과 국민 혈세로 성장해온 사립학교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해 매매가 가능하고 그것을 이사장 개인이 챙기는 것을 처벌할 수 없다니...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일반 국민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만약 이사장의 심기에 따라 학교를 사고파는 것이 현실이 된다면 교사들은 소신 있게 교육을 하기 힘들 것이다. 또 그런 학교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리 없다. 특히 이런 사학에선 석정학원의 사례처럼 교사과 직원에게 채용의 대가로 돈을 받는 부정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여러 사립학교 전현직 이사장과 관계자들이 학교 매매와 관련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진명학원과 수원의 호원학원이다. 지난해 39억에 학교를 판 수원의 호원학원 전·현직 이사장 모두 기소됐다. 또 서울의 진명학원을 75억에 사고 판 전·현직 이사장들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호원학원과 진명학원의 학교 매매 사건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학교 매매 막는 방법은 사학법 개정 뿐
이번 대법원 판결이 이후 교육계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도한 언론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한 경제신문이 이번 판결을 환영하는 사설을 실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국민의 상식은 '사립학교라고 해도 학교는 개인 소유물이 아니므로 사고파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육부나 정치권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 대해 교육부나 정치권은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일언반구 말이 없다.
지금까지 사립학교를 사고파는 것은 음지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진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로 이제 대놓고 학교를 사고 팔 수 있는 위험한 길이 열렸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사립학교법의 개정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도 사립학교를 사고파는 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여러 우려가 있음에도 사립학교 매매를 금지하는 명시적인 조항이나 처벌 조항이 없다는 형식적 논리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래서 "학교법인 운영권의 유상양도를 금지·처벌하는 입법자의 명시적 결단이 없는 이상... 처벌할 수 없다"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즉 입법권자인 국회가 사립학교 금전 매매를 처벌하는 법조항을 만들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은 예기치 않게 발생한 공백인 것이다. 학교 매매를 금지하거나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만약 이번 판결을 악용해 학교를 사고파는 일이 늘어난다면, 이는 국가적 망신이며 학생들 보기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교육당국과 국회는 당장 이번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시급히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