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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가명)는 목소리가 컸다.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때는 더욱 그랬다. 선생님들이 가볍게 묻는 말에도 선미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큰소리로 말하는 그 버릇을 알기 전까지 나는 선미가 내게 '삐딱하게' 도전하는 줄로 여겼다.

어느 날이었다. 학년 초였다. 선미는 나와 수일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챙겨 오라는 무언가를 가져오지 않고 있었다. 녀석을 교무실로 불러 들였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부른 이유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다.

"선미야, 요새 공부는 잘 되니? 반 분위기는 어떤 것 같아?"
"교실 와서 직접 보세요."

선미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딴에는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즈음 선미는 부쩍 수업 중 분위기가 산만해져 있었다. 친구와 잡담을 나누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을 때가 많았다. 신경이 거슬려 수업하기 곤란할 때도 있었다.

수업중 벌어진 '활극', 나는 왜 그랬을까

녀석의 목소리는 그런 걸 왜 묻냐는 투였다. 그런 상투적인 관심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시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미와 나를 흘깃거리는 주변 선생님들이 거슬렸다. 창피스러웠다.

"알았다. 교실로 가 봐."

목젖까지 차오른 화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선미는 쌩 하고 찬바람 소리를 내며 교무실 문을 빠져 나갔다. 선미가 간 뒤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한참이나 억제할 수 없었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선미를 나무라며 '교육'을 해야 했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몇 시간 뒤 녀석을 다시 불러냈다. 선미와 나는 교무실 옆 복도에 놓인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선미야, 아까 네 말 듣고 선생님 가슴이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너랑 차분하게 이야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네가 그렇게 매정하게 얘기해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어."
"······."

선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던졌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앞으로 선미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면 더 바랄 게 없단다."

선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꾹 다문 입은 아직 그 어떤 말도 내놓지 않을 듯했다.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어서 가서 수업 준비하거라."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며 인사했다. 선미는 인사를 꾸벅 하고 뒤돌아섰다. 녀석의 표정이 한결 풀어져 있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의 냉랭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직감했다. 앞으로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감은 적중했다. 무엇보다 수업 시간 중의 태도가 바뀌었다. 노골적으로 엎드려 자는 선미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선미는 복도를 오갈 때마다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일 때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선미는 완전한 '은균 샘 빠'가 되었다.

나는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 같은 부정적인 정서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학생들 앞에서 교사가 화를 참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참아내면서 신중하고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순간의 격정적인 화를 참지 못하면 그 결과가 대개 참혹하기 때문이다.

교직 입문 초였다. 첫 인상부터 은혜는 기가 센 아이로 보였다. 가끔은 수업 시간에 팔짱을 낀 채로 있기도 했다. 자신의 넘치는 도도함(?)을 일부러 과시하고 싶어하는 듯한 태도였다. 애송이 총각 교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문제의 그날, 은혜는 짝꿍과 심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은혜야, 수업에 집중하자."

수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은혜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보았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은혜는 짝꿍과 잡담을 계속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박은혜, 너 밖으로 나와 봐."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먼저 복도로 나갔다. 은혜도 곧 따라 나왔다.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따끔하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은혜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내 말을 들었다. '왜요', '알았어요' 등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차가웠다. 교실에서는 몇몇 아이가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린 돌린 채 우리의 한바탕 '활극'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더욱 기를 쓰고 은혜를 제압하려고 했다. 교사로서의 자존심이 거기에 달려 있다 여겼다. 그럴수록 은혜의 매서움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나와 마찬가지로 은혜 역시 자신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학생들의 '시선의 힘'은 그렇게 막강했다.

그날 벌어진 최악의 자존심 싸움은 수업이 거의 끝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은혜와는 그 해 말이 되어서야 화해(?)했다. 그 전에도 몇 번 기회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둘다 지레 서로 서먹해 하는 바람에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애송이 교사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임 시절이었다.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면 대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은 일종의 '검투사'가 된다. 한 사람은 응원군이 거의 없다. 교사 '검투사'다.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뜨거운 응원을 받는다. 학생 '검투사'다. 교사 '검투사'는 거의 필패 구도 속에서 싸움을 벌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교사가 화를 포함한 감정의 발산과 표현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교사는 전형적인 감정노동자다.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발산하지 못한 채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교사에게는 힘든 상황일 수 있겠다. 그러니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지 밖으로 표출해야 한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참아내는 일은 화병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화를 표현하는 방법과 시간, 장소를 잘 따져야 한다. 학생과 교사가 교실에서 '검투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교사가 학생에게 독기 어린 말을 그대로 뿜어내는 식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학생과 교사 그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교사는 적어도 학생들 앞에서는 노련한 감정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교사 한 사람의 순간적인 감정노동은 많은 열매를 가져다 준다.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

물론 순간적으로 억제하고 유예해 놓은 감정은 꼭 풀어야 한다. 문제의 학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 감정이 왜 생겼으며, 그것으로 자신이 어떤 심리적 변화 과정을 겪었는지 차분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검투사'가 되어 풀 때와는 전혀 다른 '힐링'의 경험을 갖게 되리라 장담한다. 선미가 '은균 샘 빠'가 되는 것과 같은 '덤'의 열매도 얻을 수 있다.

학생들에겐 함부로 하면서... 딴데 가서 굽신거리는 교사

문제가 되는 교사의 감정노동은 정작 다른 데 있다. 학생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면서 교장이나 교감과 같은 학교관리자 앞에서만 '좋은' 교사가 되려는 이들이 있다. 좋은 평가 점수를 받아 승진하는 데 교장이나 교감이 거의 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교사들도 많다. '동료'라는 구실로 말이다.

이들이 숨긴 감정은 학교 관리자나 동료 교사에 대한 뒤담화와 조롱, 나아가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표출된다. 교사들은 교무회의와 같은 공론장에서의 토론보다 술좌석에서의 중구난방식 비방회를 통해 문제의 감정을 풀어내는 경우가 많다. 교무실이 거대한 침묵의 무덤이 돼가는 배경도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학교 관리자나 동료 교사와의 관계에 관한 한, 교사는 '벌떡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무회의 시간에 '벌떡' 일어나 이런저런 쓴소리를 내뱉어야 한다. 가슴에 맺힌 얘기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풀어내야 한다.

승진이나 평가, 학교 내에서의 평판 등을 구실로 교무실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교사가 많다. 술자리에서는 뒷담화를 할지언정 교장·교감이나 동료 교사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웃는 낯만 보이는 교사들이 많다. 그런 이가 세상물정 잘 아는 유능하고 모범적인 교사 소리를 들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들이다.

'어디서나 좋은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옳고 그름과 적대적 이해관계로 중첩되어 있는데 대체 어떻게 어디서나 좋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필시 어디서도 손해 보지 않는 처세의 달인일 뿐이다.

며칠 전, 동료 교사 한 분이 메신저로 보낸 글 중 일부다. 자칭 'B급 좌파'인 칼럼니스트 김규항씨가 한 말이라고 한다. 내 경험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좋은(좋게 보이려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차가운 회색주의자이거나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기주의자였던 것 같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대개 나쁜 사람이라는 동료 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이유다.

나는 이 땅의 교사들이 제발 할 말을 '제대로'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학생들 앞에서 '제대로' 말했으면 한다. 예의 감정노동에 맞게 학생들을 대해 보자. 잠깐 감정을 숨기고 유예한 뒤에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며 그것을 표출해 보자. 학생들과의 관계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교장이나 교감, 동료 교사 앞에서도 '제대로' 말했으면 좋겠다. 그때는 '감정노동'이라는 말 따위는 잊자. 그들에게 할 말은 하자. 교무실이 온전한 공론장이 될 수 있도록 하자. 침묵하는 교사들이 외로운 '섬'(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의 비유)처럼 홀로 떠 있는 교무실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아프니까 감정노동이다' 공모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감정노동#교사#학생#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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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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