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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장 지령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금릉에 폐허가 된 사당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가문의 흥망성쇠에 따라 엊그제 새로 높이 솟은 사당이 있는가 하면, 수백 년을 위엄 있게 존속하던 사당이 역적으로 몰려 한 세대 만에 잡초가 무성한 쑥대밭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금릉의 북쪽 대보산 자락에 있는 어느 고관대작의 사당은 세찬 바람만 한 번 불면 곧 쓰러질 것 같이 한쪽이 기우뚱하게 서 있어 보는 사람마저도 힘들게 했다. 차라리 맘씨 좋은 바람이 힘을 모아 단번에 눕혀 주는 것이 보시(布施)가 될 성 싶다. 그러나 능선을 타고 온 바람은 보시에는 관심 없고 쑥대와의 희롱에만 재미붙여, 쑥대머리만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희희낙락하고 있다. 대보산 서쪽 능선의 검은 휘장을 손톱으로 주욱 긋고 초승달이 세상구경을 할 무렵, 검은 그림자가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는 박새처럼 날랬다.

검은 그림자는 제당의 뒤쪽으로 돌아 칸막이 앞에 섰다. 이윽고 칸막이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답지 않군. 일을 실패하다니. 북명(北溟)선생의 문하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이상한 목소리였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목소리라면 저 궁중에 있는 내관이라고 추측이라도 하련만, 이 목소리는 괴이하게도 성조가 없었다. 무조음이라고 할까. 말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이 없이 딱딱 규칙적으로 끊어지는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넘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동요가 없었다.

"뜻밖의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오.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니 실망할 건 없소."

검은 그림자 무영객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음색으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럼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나?"
"소주로 갈 것이오."
"소주?"
"그 서생놈이 소주로 갔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오."

"그 작자를 잡는다면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할 순 없소. 다만 그 서생놈이 일운상인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았고, 임종 당시에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걸 알고 있소. 그래서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은화사에서 서생을 빼돌린 거요. 현재로선 그 서생을 잡아다 족치는 수밖에 없소."

"만약, 그 서생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목소리의 음색이 낮아지며 성조가 들어가자 자연스럽기보다는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영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깨끗이 실패를 인정하겠소."

무영객은 까짓거 하는 말투로 다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비용이 문제가 아냐! 잠잠하던 벌집을 건드려 일이 시끄럽게 됐다는 게 문제지. 일운상인의 죽음으로 인해 무극진경의 행방이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일이 복잡해지지."

목소리가 바로 되받아쳤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오. 내 예감을 믿는다면 일운상인은 임종 직전에 그 서생에게 무언가를 남겼소. 일부러 관외 제자인 그자를 부른 것 하며, 임종에 즈음하여 은화사와 무림맹 놈들이 무언가를 캐기 위해 일부러 왔다는 것이 그 방증이오." 

"좋아, 아직 포기하진 않겠어. 아니 포기할 순 없어. 실패해도 좋으니 끝까지 서생을 추적하게. 비용 문제는 생각하지 말고."
"좋소, 나도 오점을 남기기 싫소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칸막이 너머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다. 늘 이런 식이다. 이 자는. 가면 간다 오면 온 다는 기별도 없이 용건만 끝나면 말없이 사라진다. 자신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다. 목소리가 살며시 빠져나가는 기척을 알면서도 무영객은 모른 척 했다. 보법이 정연하고 민첩한 걸 보니 제법 내공의 깊이가 있는 자이다. 잠시 후 무영객이 칸막이 앞에 드리워진 휘장을 걷자 틈에 끼여 있는 비단 주머니가 보였다. 무게가 묵직한 걸 보니 금화가 제법 들어있다. 어쨌건 이 자는 보수 하나는 후하게 쳐준다.

무영객은 폐허가 된 사당을 나오면서 밤새 달려 소주까지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 서생이 그곳에 계속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비영문 장문인의 말을 들어보건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연 장문인이라고 했던가. 이제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자는 장문인이 될 근기가 없었다. 자고로 일파를 이끌어나갈 자는 결코 성정(性情)이 물러서는 안 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위기 시에는.

비영문의 장문인 연발연은 무영객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제 아무리 소박하다지만 그래도 강호에 이름깨나 알려진 문파인지라, 연 장문인의 거처 규헌당은 포졸들이 형식적으로 순라를 도는 여염집처럼 허술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비영문 제자들의 시선쯤은 가볍게 벗어날 수 있는 게 그의 은신술(隱身術)이다. 그는 장문인이 머무르고 있는 건물의 처마에서 일각을 지켜본 다음 고양이처럼 뛰어내려 뱀처럼 창을 넘었다. 축시가 막 지나는 시간이었다. 침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곳은 모충연의 거처처럼 외딴곳이 아니라서 속전속결로 해치우는 게 관건였다. 

며칠 사이 신경을 많이 써 피곤했던지 장문인은 가볍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무영객은 몇 개의 혈도를 짚으며 사전 조치를 한 다음 살며시 장문인을 깨웠다. 장문인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무영객은 토끼눈이 제법 귀엽다고 느끼면서 단도직입으로 서생의 행방을 물었다. 물론 장문인이 처음부터 원하는 답을 주진 않았다. 모르오. 당연한 수순이고 예상했던 바다. 무영객은 재빨리 잠혼침을 꺼내 장문인의 승령혈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시간이 급한 만큼 짧고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장문인의 머릿속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누를 황이 그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무영객은 간단하게 물었다. 서생은 어디로 갔는가. 장문인은 더 간단하게 답했다. 소주. 소주 어디, 누구에게로? 소주의 염상 혁련지에게. 왜? 그녀는 관조운의 사매요. 알겠소. 이제 그만 쉬시오. 무영객은 잠혼침을 빼낸 다음 귀 옆의 청궁혈에 작은 침을 하나 박아넣었다. 장문인은 옆으로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장문인은 깨어나면 자신이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관조운의 행방을 말했다는 걸 어렴풋이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주부터 화, 목, 주2회 연재하겠습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연재주기가 늘어져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주3회' 주기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위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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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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