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착한 사람을 칭찬할 때 종종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법의 많은 부분들은 강자와 나쁜 사람들의 욕심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약한 자와 착한 사람일수록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양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다른 건 인간에겐 양심과 제도화된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규제도 마찬가지다. 하지 말아야 할 한도를 정해 약자를 보호하고 공공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도록 한 것이 규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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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쳐부술 원수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 몸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다는 암 덩어리로 생각을 하고 규제를 반드시, 겉핥기식이 아니라 확확 들어내는 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으면 한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달 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 이후 규제 개혁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2월 19일 국토·해양·환경 분야 업무보고에서는 규제개혁이 곧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고, 지난 1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규제를 '쳐부술 원수', '암 덩어리'에 비유하며 규제개혁 의지를 표명했다. 또 규제를 손톱 밑에 박힌 몇 백 개의 가시로 표현하며 관계자들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쳐부술 원수', 대통령의 자가당착

하지만 대체 어떤 의미로 말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집단의 갈등과 국회의 치열한 논의·합의를 거치는 규제 법안 발의와 의결 공포 과정이 단지 손톱 밑에 가시를 박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약자를 보호하고 공공의 이익을 지켜낸 규제 법안들이 우리 사회의 '암 덩어리'라는 것인가... 대통령의 발언을 몇 번이나 되짚어 봐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각종 규제 법안 발의와 의결에 참여했을 박 대통령이 규제를 암 덩어리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자가당착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물론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를 고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맞지 않으면 고치거나 폐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규제를 만들 때만큼의 지난한 과정과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수백 가지 규제가 손톱 밑 가시처럼 뽑힌다면, '공공의 이익과 약자를 위한 법적 보호망'이라는 가치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규제개혁'을 '일자리 창출'로 읽기 전에, 규제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라는 긍정적 측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규제개혁은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강자의 횡포에 대한 방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 5년이 남긴 아픈 교훈이다.

"고용창출을 위해 정부가 규제를 풀 것이니 재계도 일자리 만들기에 적극 동참해 달라."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1월 18일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경제5단체장을 만나 위와 같이 읍소했다. 이 자리에서 경제단체장들은 서비스산업 육성과 경제자유구역 활성화, 외국인 투자유치 완화를 주문했고 윤 장관은 적극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정부의 고환율 정책과 규제 완화로 대기업은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리는 신장세를 이어갔지만, 질 좋은 일자리는 오히려 줄었고 저임금·비정규직의 질 낮은 일자리만 우후죽순 늘었다. 정부가 온갖 규제를 풀어 기업들에 무제한적 자유를 가져다 준 결과였다. 규제를 안 하면 자본이 스스로 탐욕을 제어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지만, 현실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정부-보수언론·경제지-경제단체, 규제 개혁 삼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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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그때와 똑같다.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이 나서서 '규제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규제 개혁을 역설하고, 보수언론과 경제지는 규제 때문에 '외국기업 유치도 안 된다, 국내 기업들도 빠져 나간다'는 볼멘 기사들을 쏟아낸다. 경제 단체들은 못이기는 척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협조하겠으니 규제개혁을 시급히 해달라'고 주문한다.

"정부의 과감한 규제개혁에 호응해 투자확대와 고용창출에 힘쓸 것이며 생산적 노사관계 형성을 위한 노사정간 협력을 강화할 것이다." -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논평 중 일부

"경제계도 투자 확대 및 일자리 창출과 창조경제 구현을 통해 우리 경제의 성장 엔진을 재점화 시키는데 적극 동참해 나가겠다."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논평 중 일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더불어 규제 개혁을 발표하자 재계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며 일제히 환영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전경련은 보건·의료, 문화·관광, 금융·보험 등 5개 분야에 대한 총 94개의 규제개선 과제를 관련부처에 건의했다. 정부·보수언론과 경제지·경제단체가 규제 개혁에 팔을 걷어붙인 모양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와 경제단체가 내놓은 규제 개혁 대상을 보면 대통령의 말처럼 규제가 쳐부술 원수, 손톱 밑에 가시 뽑듯이 뽑아야 될 문제인지 의문이 든다. 지난 12일 정부가 내놓은 '그린벨트 해제 지역에 상업시설과 공장을 짓게 하겠다'는 규제 개혁안만 해도 그렇다. 기업을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투기와 환경 파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그 어떤 대안도 없다. 또 지방 공장부지가 텅텅 빈 상황에서, 서울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그린벨트 해제 지역의 공장·상업시설 허용은 수도권 과밀화·땅값 상승을 불러 올 수도 있다.

또한 영리병원 도입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풀겠다는 계획, 외국 교육기관 유치를 위해 과실송금(투자가들이 외국에 투자하여 얻은 이익(배당)금을 본국에 송금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계획 등은 의료 민영화, 교육개방과 직결되는 것으로 단지 손톱 밑에 가시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전경련이 내놓은 94개 규제개혁 과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학교 주변에 유흥시설이 없는 호텔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나 1인당 면세 금액을 늘려달라는 요구는 쉽게 수긍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경제민주화 대신 규제개혁, 초심은 어디로 갔나?

그린벨트 주변의 개발을 제한하거나 교육과 병원을 비영리 기관으로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이 감내한 것들이다. 학교 주변에 숙박업소 건축을 금지한 건 학생들의 퇴폐문화 유입을 막아보자는 자구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듯 모든 규제에는 충분한 이유와 다수의 동의가 담겨 있다. 대통령이 암 덩어리라고 지칭한 수많은 규제는 지금도 공공의 이익과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좋은 점만 있는 정책은 없다. 정부, 보수언론과 경제지, 경제단체가 규제 개혁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규제 개혁은 일자리 창출과 동의어도 아니고 규제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유린을 조장하고 서민들을 쓰기 편한 저렴한 노동자로 전락시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해 준 이명박 정권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의 다른 버전이라는 생각 지울 수 없다. 불과 1년여 전,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던 박근혜 대통령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정권도 살고 서민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