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가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까? 천사나 악마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차피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천사와 악마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신화에 따르면 악마는 타락한 천사다.
그러니 타락한 천사와 그냥 천사가 만나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다가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도 타락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천사와 악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에 의해서 키워진 소녀레이니 테일러의 2011년 작품 <연기와 뼈의 딸>의 주인공인 17세 소녀 카루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독특하고 비밀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카루는 낮에는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악마의 심부름을 다닌다. 그녀가 이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카루와 가장 친한 친구들도 이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밤이 되면, 또는 악마의 지시가 있을때면 자신만이 알고있는 포털을 통해서 괴물들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스스로를 '키메라'라고 부르는 종족들이 살고 있다. 뿔이 달린 숫양의 머리를 가지고 인간과 비슷한 몸을 가진 키메라, 뱀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가진 키메라, 인간의 눈에 앵무새 부리를 가지고 있는 키메라 등이 그곳에 살고 있다.
카루는 태어날 때부터 그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 키메라들은 카루가 정상적인 인간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 주었다. 그러니 카루가 그들의 심부름을 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이 카루에게 부탁하는 것은 단순하다. 포털을 통해서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이빨'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루는 포털이라는 마법을 통해서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북부 캐나다에 가서 늑대 이빨을 가져오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서 방울뱀의 이빨을 받아오기도 한다. 이런 일을 하다가 러시아에서 총에 맞은 적도 있다.
이상한 만남은 모로코에서 시작되었다. 이날도 키메라의 부탁으로 모로코의 한 도시에서 이빨상인과 거래하고 있던 카루에게 한 남성이 나타난다. 그리스 조각상을 옮겨다 놓은 듯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남성이다. 이빨상인은 '천사가 나타났다!'라고 외치고, 그 남성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면서 카루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이어질까?
천사와 악마 사이의 기나긴 전쟁<연기와 뼈의 딸>을 읽다보면 천사와 악마의 구별 자체가 좀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흔히 천사라고 하면 순백색의 옷을 입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다니면서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천사들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 이들은 천 년 동안 지속된 키메라와의 전쟁 때문에 지쳐 있다. 천사와 악마가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족을 몰살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해 온다면 그들의 정신상태도 거기에 맞게 변해갈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군인으로 키워지는 천사도 있다. 천사와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실존한다면 <연기와 뼈의 딸>에서 묘사하는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같이 공존할 수 없으니 서로 증오하고 파괴하려는 두 종족. 한 쪽은 세상을 지배하려하고 다른 쪽은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는 두 종족.
천사와 악마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작은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작품 안에는 여러가지 마법도 나오고 소원을 비는 장면도 있다. 한 키메라는 인상적인 말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마법이나 소원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기나긴 싸움도 끝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연기와 뼈의 딸> 레이니 테일러 지음 / 박산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