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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크림 반도
크림 반도 ⓒ 고정미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속해 있던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 연방에 합병됐다. 지난 3월 16일 크림자치공화국이 주민투표를 통해 합병을 결의하고, 22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합병안에 서명한 데 따른 결과다. 1954년에 소련의 일원인 러시아에서 소련의 또 다른 일원인 우크라이나로 귀속됐던 크림반도는 이로써 60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언뜻 아이스크림(ice-cream)을 연상케 할 수도 있는 크림(Crimea, Krym)이란 지명은 이 땅에 거주한 유목민인 키림족(Qirim) 때문에 생긴 것이다. 크림반도는 처음에는 '타우리카'라는 국명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타우리카로부터 시작한 크림반도의 역사는 말도 못할 수난의 과정이었다. 이곳은 외부세력인 킴멜·스키타이·케르소네소스·로마제국·고트·아바르·하자르·페체네그·플로베츠·몽골제국 등의 지배 혹은 영향을 순차적으로 받았다. 15세기에는 돌궐족의 후예인 오스만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18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자 크림반도는 반혁명군의 거점이 됐다. 하지만 반혁명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1921년 소련에 편입되어 크림자치소비에트공화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에는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1944년에 소련에 다시 편입되었다.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로 넘어간 1954년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소련의 일원이었다. 이때 소련 중앙정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화합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크림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관했다. 소련 내의 민족감정을 불식시키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몇 개월 만에 물거품 된, 크림반도의 '완전 독립'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2년에 크림반도는 독립을 선포했다. 러시아의 일원도 우크라이나의 일원도 아닌 완전 독립의 길을 꿈꾼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몇 개월 만에 우크라이나에 다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번에 다시 러시아로 귀속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크림반도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편이다. 크림자치공화국의 전체 인구 200만 명 중에서 러시아인은 60%, 우크라이나인은 24%다. 이런 인구 구성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다. 300년 넘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인의 비중이 이처럼 높아지지 않았다면, 1990년대 이후의 혼란기를 틈타 크림반도는 전혀 의외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 

이번 합병을 보면서, 소련 해체 뒤로 미국의 그늘에 가려졌던 러시아가 어느새 영토 확장에까지 나설 정도로 힘을 추스르게 되었나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은 중동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갈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크림반도 지배는 중동·유럽인들에는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크림 반도와 초원길
크림 반도와 초원길 ⓒ 고정미

어느 시대건 간에 '세계 최대 위협세력'(아래에서는 가급적 '위협'으로 약칭)이 존재한다. 기원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런 위협세력의 역할을 한 것은 주로 유목민족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족 등이다.

유라시아대륙만 놓고 볼 때, 서기 17세기 이전까지 '세계 최대 위협세력' 즉 '위협'은 주로 가로축을 따라 이동하면서 세계 각지에 위기를 전파했다.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초원에 도달하는 초원길이 이런 '위협'의 이동 루트였다.

물론 모든 '위협'이 항상 가로축을 따라 이동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북쪽에 있는 몽골초원에서 남쪽에 있는 중국 농경지대로 '위협'이 이동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위협'이 가로축이 아닌 세로축으로 이동한 셈이다. 하지만 유목민이 유라시아 초원길을 따라 가로축으로 이동한 뒤 중국으로 남하했으므로,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중국에 가해진 '위협'도 가로축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위협'이 가로축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위협'이 지나가는 범위 안에서 바다와 대륙의 주요 접점은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였다. 지금의 터키공화국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 쪽에 있고, 발칸반도는 유럽 쪽에 있다.

아나톨리아반도와 그 주변인 중동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강대국들이 포진한 데 반해, 발칸반도에는 약소국들이 포진해 있었다. 발칸반도의 경우에는, 전성기의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약소국들이 포진했다.

이 때문에 '위협'이 가로축으로 이동하는 시대에, 발칸반도는 아나톨리아반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지중해·에게해·흑해를 건너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축으로 이동하는 세력이 발칸반도를 획득하기 위해 열렬한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발칸반도는 돌궐족의 후예인 오스만투르크의 전성기 때 특히 많은 시련을 겪었다. 당나라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난 돌궐족 후예들이 중동에서 기반을 잡은 뒤 동유럽에 진출할 목적으로 발칸반도를 집중 공략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칸반도는 '위협'이 가로축을 따라 이동하는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고난 받는 땅 중 하나였다.

러시아가 대대적 영토 팽창에 나선 목적

그런데 세계 최대 위협세력이 가로축뿐만 아니라 세로축을 따라서도 이동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발칸반도 못지않게 또 다른 반도 두 곳이 고난의 땅으로 부각되었다. 변화의 직접적 계기는 러시아의 팽창이었다.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당시 명칭은 모스크바공국)는 몽골이 몰락한 뒤인 15세기부터 본격적인 세력팽창에 나섰다. 러시아는 몽골인들이 다니던 초원길을 따라 북아시아의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다.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정착된 것은 17세기, 확고하게 정착된 것은 19세기였다. 1860년에 만주 동부인 연해주를 차지하고 조선과 국경을 맞댐으로써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은 일단락되었다.

러시아가 대대적인 영토 팽창에 나선 직접적 목적은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이 활약한 이후인 16세기부터 유럽에서는 바닷길을 통한 세계 진출이 대세였다. 유럽인들은 바닷길을 통해 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러시아는 대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까닭에 지중해나 태평양 쪽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중해와 태평양은 러시아 본거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두 곳에 진출하려면 일단은 영토 팽창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개의 바다에 진출할 목적으로 러시아는 몸집을 불리는 일에 우선 착수했다. 러시아는 초원길을 따라 시베리아 쪽으로 영토를 팽창했다. 시베리아에 진출하는 동안에 러시아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은 것은, 당시 유럽 각국이 대서양·인도양·태평양 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러시아는 손쉽게 유라시아 북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유라시아 북부를 어느 정도 장악한 러시아는 이번에는 지중해와 태평양을 향한 남진정책으로 눈으로 돌렸다. 러시아와 바다를 연결할 부동항을 남쪽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동유럽에서부터 북아시아까지를 차지함으로써 이미 몸집이 커진 러시아가 남쪽으로 몸을 돌림에 따라 세계 최대 위협세력이 세로축을 따라 이동하는 양상이 출현했다.

이로 인해, 가로축으로 이동하는 '위협' 못지않게 세로축으로 이동하는 '위협'도 세계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남진을 기도하는 러시아의 힘과, 그런 러시아를 견제하는 세계 각국의 힘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러시아 공포증이 싹트기 시작했고,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이런 공포증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일본이 1904~1905년에 러일전쟁을 도발한 명분 중 하나도 러시아 공포증에 맞선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반러시아의 투쟁, 크림전쟁에서 폭발

 크림전쟁 당시 영국 기병대와 러시아 군대가 격돌하는 모습.
크림전쟁 당시 영국 기병대와 러시아 군대가 격돌하는 모습.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남진을 기도하는 러시아와 남진을 막는 반(反)러시아의 충돌은 러시아와 바다를 잇는 두 개의 반도에서 순차적으로 표출되었다. 두 개의 반도는 흑해 북부의 크림반도와 태평양 서부의 한반도를 가리킨다. 러시아는 17세기부터는 크림반도 진출, 19세기부터는 한반도 진출을 꾀했다.

먼저, 러시아는 흑해를 통해 에게해와 지중해로 나아가고자 크림반도에 눈독을 들였다. 1768~1774년에  러시아는 당시 세계 최강 중 하나인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크림반도를 획득했다. 이 전쟁이 제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러투전쟁)이다. 이때부터 크림반도는 세계 정치의 최대 화약고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크림반도가 이때 처음 화약고가 된 것은 아니다. '위협'이 가로축으로 이동하던 시대에도 이 지역은 항상 외세의 지배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크림반도보다 발칸반도가 훨씬 더 외세에 시달렸다. 남진을 기도하는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그런 러시아를 유럽과 중동이 견제함에 따라 이곳이 이때부터 세계 최대의 화약고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는 1860년에 청나라와의 베이징 조약을 계기로 만주 동부인 연해주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자, 세계 각국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이어 한반도까지 삼키지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는 생각 외로 소극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러시아가 크림반도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 곳에 똑같은 힘을 투입할 수 없었기에, 한반도보다 크림반도에 더 큰 힘을 투입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했지만, 러시아의 남진을 두려워하던 유럽과 오스만투르크는 어떻게든 크림반도를 러시아의 손에서 빼앗으려 했다. 크림반도를 획득하기 위한 러시아와 반러시아의 투쟁은 크림전쟁(1853~1856년)에서 또 한 번 폭발했다. '백의 천사'라고 불리는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것도 이 전쟁 때였다. 하지만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렇게 17세기 이래로 크림반도는, 남진을 기도하는 러시아와 남진을 저지하는 유럽·오스만투르크가 충돌한 곳이었다. 이 같은 크림반도의 열기가 19세기부터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러시아 대(對)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일본·청나라의 대결을 초래했으니, 이런 점에서 보면 크림반도와 한반도는 동병상련을 앓았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 정상이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합의를 도출한 얄타회담이 열린 곳도 바로 크림반도다. 크림반도와 한반도는 여러 모로 인연이 많은 곳이다.

세계 각국이 이번 크림반도 합병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의 영토가 조금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크림반도가 한반도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진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동과 유럽은 17세기부터 러시아 공포증을 앓았기 때문에 크림반도 합병에 대해 더욱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크림 합병#크림반도#크림공화국#크림자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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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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