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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이 3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3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 이미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고사가 '미생지신'이다. 지난 2010년 세종시 수정 논란이 달아올랐을 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정몽준 의원과 박근혜 의원의 논쟁은 유명했다.

정 의원이 먼저 공격했다. "미생이 애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익사했다"며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했던 박 대통령을 미생에 빗대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었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며 "세종시 원안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선 안되는 것이었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라고 맞받아쳤다.

결국 세종시 원안은 지켜졌고 박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신뢰 이미지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또 3년 뒤에는 대통령이 됐다.

미생의 고사를 둘러싼 공수 4년 만에 뒤바뀌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미생지신은 부메랑이 됐다. 지난 30일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지금 박 대통령은 미생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며 박 대통령의 기초선거 무공천 공약 번복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4년 전 미생의 처지라면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며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안했다. 

원내 의석 130석의 제 1야당 대표의 제안에 청와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철저한 무시 전략이다. 그동안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대통령에게 해가 되는 사안이 생기자 침묵을 유지하면서 책임을 여당에 넘겼다.  

대통령 대신 공약 폐기를 사과하고 나선 것도 여당이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국민과의 약속은 천금과도 같은 것인데 이 약속을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하게 됐다. 고개 숙여 사과 드린다"고 말했다. 여권 내에서 처음 나온 사과 목소리였다. 

하지만 기초선거 무공천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지난 대선 때 기초선거 공천 폐지는 당시 새정치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안철수 후보가 먼저 들고 나왔지만 이에 질세라 박 대통령은 기초의원은 물론 기초단체장 공천까지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직후인 지난해 초만 해도 여권은 기초선거 공천 폐지에 소극적이던 민주당을 연일 비난했다. 하지만 막상 지방선거가 닥치자 돌변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당시 정치 쇄신 분위기에 편승한 무리한 공약이었다"는 이야기가 연일 흘러나왔다. 청와대 내에서도 "기초선거 공천을 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뻔한데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게 우선일 정도로 무공천이 절대적 가치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미생의 고사에 대입하면 기다리면 익사할 게 뻔한데 다리 밑에서 기다리자고 하는 야당의 주장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이다. 미생의 고사를 둘러싼 공수가 4년 만에 뒤바뀐 셈이다.

여당 원내대표의 대리 사과, 무책임하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 도중 목을 축이고 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 도중 목을 축이고 있다. ⓒ 남소연

여당도 대선공약에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지만 최종 책임자는 박 대통령 자신이다. 여당 원내대표가 대신 사과할 일이 아니다. 4년 전 박 대통령이 한 말대로라면 기초선거 무공천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또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다.

물론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진짜 문제는 비겁한 침묵이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박 대통령은 판단의 오류를 인정하거나 사과하기는커녕 지난 대선 당시와 지금의 판단이 달라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있다. 여당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자신의 대선 공약 문제를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할 문제'라며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한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로 대통령까지 됐다. 하지만 원칙과 신뢰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다. 한번 흠집이 나면 그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균열은 이미 중심부에서 시작됐다. 이미 대선 때 약속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후퇴했다. 기초연금의 경우 국가 재정이 부족하다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기초공천 폐지는 돈 들어갈 일이 없는 공약이다.

그동안의 당청 관계를 고려했을 때 최경환 원내대표가 이날 기초선거 공천을 강행하겠다고 밝힌 것에 박 대통령의 의중이 빠졌을 리 없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생각이 왜 대선 때와 달라졌는지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게 최소한의 의무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건 여당 원내대표의 대리 사과가 아니라 대통령의 목소리다.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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