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새 나라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여러 정적들을 격파했다. 그중 대표적인 라이벌은 이인임, 최영, 조민수, 이색, 정몽주 등이다.
이 중에서 조민수는 다른 정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왕조를 창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조민수는 이성계가 사표를 쓰도록 만들었을 정도로 이성계를 코너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계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준 인물이다. 그래서 조민수에 관해 살펴보는 것은 이성계의 집권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왕시대 실권자 이인임 눈에 띈 조민수조민수는 지금의 경상도 창녕 사람이다.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14세기 초반에 태어났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서 그의 조상에 관한 언급이 없는 점을 볼 때, 그는 가문의 배경보다는 자기 힘으로 출세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조민수가 성장한 시기는 몽골제국이 약화되고 명나라가 급부상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홍건적(중국 농민반란군), 여진족, 왜구(일본 해적) 같은 동아시아 비주류 세력은 고려·몽골·명나라·일본·오키나와 등을 괴롭히며 지역 질서를 교란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조민수는 홍건적을 격파하는 한편, 왜구와의 전투에서는 승패를 교환하면서 고려의 주요 장군으로 성장해 나갔다. 국제정세와 군사적 능력이 그의 출세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요인들에 더해, 공민왕의 후계자인 우왕 시대의 실권자인 이인임과의 인연도 조민수의 출세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 이인임 열전에 따르면, 이인임은 권력과 돈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자기편이 재판에서 지면 법관에게 압력을 넣어서라도 재판 결과를 뒤집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인임의 눈에 뜨인 인물 중 하나가 조민수였다.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서는 조민수가 이인임의 천거를 받았다고 했다. 조민수 역시 '이인임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가문의 배경이 약한 것으로 보이는 조민수으로서는 이인임을 아버지나 형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인임에 대한 은혜 갚으려 창왕을 옹립
조민수는 이인임 라인이었지만, 1388년에 이인임이 실각될 때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인임을 실각시킨 최영의 신임을 받아 요동정벌군 2인자인 좌군도통사에 임명되어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이인임에게 은혜를 입은 전력을 갖고도 최영에게 신임을 받은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조민수는 시세의 흐름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이런 기질은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에 주둔했을 때도 나타났다.
조민수는 '지금 요동을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계의 논리를 수용하고 요동정벌군을 쿠데타군으로 전환시키는 데 동의했다. 최영의 신임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최영을 저버리고 이성계와 한편이 된 것이다.
축약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의 우왕 편에 따르면, 쿠데타를 단행하기 전에 조민수는 "개경에 가면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혈통이 아닌 왕족을 임금으로 추대하자"고 이성계와 합의했다. 하지만 조민수는 막상 정권을 잡은 뒤에는 약속을 저버렸다. 우왕의 혈통을 끊으려는 이성계에 맞서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한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조민수가 창왕에게 집착한 이유 중 하나는 이인임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창왕은 이인임의 이종사촌의 외손자다. 그래서 촌수로는 6촌 관계다. 조민수는 그런 창왕을 옹립함으로써 이인임의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이다.
의외의 일격에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은 이성계이성계를 견제하고 창왕을 옹립하고자 조민수가 선택한 것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신진사대부(개혁파 관료 그룹)의 정신적 지주인 이색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이색과 힘을 합쳐 창왕을 옹립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어내고 정권 1인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창왕을 옹립한 날짜는 우왕 14년 6월 9일, 양력으로 하면 1388년 7월 17일이었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6월 26일로부터 3주 뒤의 일이었다.
조민수로부터 의외의 일격을 맞은 이성계는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이성계의 영향력이 조민수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색과 왕실이 조민수를 지지했으니, 이성계가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조민수-이색의 제휴로 이성계는 정국 주도권을 빼앗긴 채 창왕 정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라는 밥상은 이성계가 주도적으로 차렸는데, 밥상 위의 산해진미는 거의 다 조민수의 입안으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이로 인한 정신적 상처 때문인지 이성계는 얼마 뒤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 사표는 반려되었다.
만약 이런 상태로 쭉 나갔다면, 이성계의 영향력이 훨씬 더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이성계의 조선 건국도 그만큼 힘들어졌을 것이다. '만약 이런 상태로'라는 것은 조민수가 별다른 실수 없이 국정을 이끌었을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조민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 1인자가 됐다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권력의 맛을 향유하는 데 빠져들었다. 정권 1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농업경제 사회에서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남의 직원과 회사를 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모자라, 조민수는 이인임의 복권을 추진하고 신진사대부들의 개혁을 방해했다. 특히 이인임의 복권을 추진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악수(惡手)였다. 조민수는 신진사대부들의 지도자인 이색의 지원에 힘입어 이성계를 제압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런 사람이 신진사대부들의 적인 이인임의 복권을 추진하는 것은 권력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권을 잡은 기쁨에 취해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민수의 연이은 악수,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다
조민수의 연이은 악수는 조민수에게 치를 떨고 있던 이성계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성계 쪽에서는 조준의 주도 하에 조민수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조민수를 유배 보내는 데 성공했다. <고려사> 신우 열전(우왕 열전)에 따르면, 조민수가 실각된 시점은 우왕 14년 7월 9일 이후인 양력 1388년 8월 9일 이후였다. 창왕을 옹립한 지 1개월 정도 뒤에 부정부패 혐의로 권좌에서 밀려난 것이다.
조민수가 무너지자 조민수-이색의 지원 하에 유지되던 창왕 정권의 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이성계·정도전·정몽주는 이듬해인 1389년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민수가 만든 정치적 작품은 이로써 파괴되고 말았다. 그 해에 그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위화도 회군 뒤에 조민수는 신속한 선제공격으로 이성계를 제압했다. 그는 이색과 왕실을 자기편으로 만듦으로써 명분 싸움에서 이성계를 능가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가 신중을 기했다면, 이성계 측이 그를 섣불리 공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민수는 권력을 잡자마자 권력형 부정비리를 자행함으로써 자신이 획득한 명분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준비되지 않은 권력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위한 대문을 활짝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성계의 라이벌로서 한때 이성계를 코너로 몰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성계의 조역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