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현빈이 정조 이산을 연기한 <역린>은 1777년에 발생한 정조 암살미수 사건을 다룬 영화다. 역린(逆鱗, 거꾸로 난 비늘)은 중국 전국시대 인물인 한비의 사상을 담은 <한비자>의 세난(說難, '설난'으로도 읽힘) 편에 나오는 표현이다.
한비는 군주에게 충언을 하기 전에 군주의 기분부터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용이란 동물은 유순하기 때문에 길들이면 올라탈 수 있지만, 목 밑의 지름 한 자짜리 역린을 사람이 건드리면 필시 그 사람을 죽인다"라고 했다. 충언을 하더라도 임금의 아킬레스건 즉 아픈 부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역린이란 표현은 <한비자>의 용례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화에서는 역린이 임금의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임금의 분노' 혹은 '임금의 분노를 초래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역린>은 정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정조 1년 7월 28일(양력 1777년 8월 30일) 경희궁 존현각에서 벌어진 암살미수 사건을 24시간으로 쪼개어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간 중간에 회상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구성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영화가 실제 그대로인 것 같은 착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영화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보수파인 노론당이 정조를 죽이려 했다는 스토리만 실제 사실과 일치하고 나머지 스토리는 실제와 거의 무관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항상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정조영화에서는 광백(조재현 분)이 운영하는 암살 용역업체가 오랫동안 정조 암살을 준비했다는 스토리를 제시했다. 광백이 갑수(정재영 분)라는 아이를 내시로 만들어 정조의 측근으로 심어두고 을수(조정석 분)라는 또 다른 아이를 전문 킬러로 양성한 뒤 1777년에 궁궐에 침투시켰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는 그가 왕세손이었을 때부터 있었다. 보수파는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그를 죽이려 했다. 정조 즉위년 6월 23일자(1776년 8월 6일자) <정조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이 때문에 정조는 몇 달 동안 관복을 입은 채 잠이 든 적이 있을 정도로 항상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암살 작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왕세손 시절의 정조를 죽이려는 계획이 정조의 즉위 이후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1777년 암살미수 사건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 4월 27일 이후의 정세가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즉위 이전의 암살계획과 즉위 이후의 암살계획은 상호 별개였던 것이다.
1777년 암살 작전의 직접적 계기는 1776년 즉위식에서 발생한 돌발 사태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충격 발언으로 즉위식 식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것은 개혁을 추구하다 죄인으로 몰려 뒤주(곡식 상자)에서 죽은 사도세자를 정치적으로 복권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보수파 노론당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조의 선전포고는 단순히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도세자의 사당과 무덤을 격상시키는 동시에, 사도세자를 죽인 홍인한·정후겸 등에 대한 사법적 응징에 착수했다. 정조의 이 같은 행보는 보수파를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런 분위기를 대표하듯, 홍인한의 인척인 이상로는 홍계희(사도세자 살해의 또 다른 주범)의 아들인 홍지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상황이 아름답지 못해서 비위가 상한다"고 토로했다. 정조의 행보를 두고 '비위가 상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 정조 암살 계획이었다.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은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었다.
홍상범은 대담하게도 궁궐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는 정조의 경호 장교인 강용휘를 비롯하여 궁녀와 남자 직원들을 포섭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 직원들이란 내시뿐만 아니라 궁 밖에서 출퇴근하는 남자들까지 포함한다. 또 홍상범은 정조의 새 할머니이자 정적인 정순왕후를 보좌하는 상궁까지 암살계획에 끌어들였다.
상당히 비효율적인 영화 <역린> 속 암살작전
기본적인 인적 준비를 마친 홍상범은 강용휘를 통해 전흥문이란 자객을 고용했다. 전흥문은 <역린>의 을수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이다. 영화 속의 을수가 어려서부터 암살 훈련을 받은 전문 자객인 데 반해, 전흥문은 한양 시내의 원동(院洞)에서 임장(任掌)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임장은 요즘 말로 하면 동사무소 공무원이었다. 호적 사무가 주된 업무였다. 전흥문은 주로 하는 일은 호적 사무이지만, 무예가 탁월해서 강용휘에 의해 자객으로 발탁됐다. 그는 암살작전에 뛰어드는 조건으로 여자도 소개 받고 상평통보 15냥도 받았다.
<역린>의 광백은 을수가 정조 암살에 대한 사례비로 15냥을 받는 사실을 비웃었지만, 실제로 이 금액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사극에서는 1냥이 지금의 몇 만 원 정도로 취급되지만, 동전의 기본 단위는 1문 혹은 1닢이었고 1문이 100개 모여야 1냥이기 때문에 1냥은 상당한 금액이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 1명이 보통 5~15냥에 거래된 점만 봐도, 전흥문이 받은 15냥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 수 있다.
<역린>에서는 1777년 8월 30일에 노론당이 을수를 궁궐에 침투시키는 한편으로 별도의 군대를 대궐 밖에 대기시켰다고 했지만, 자객과 반란군을 동시에 동원하는 것은 일반적인 군주 암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쿠데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구태여 자객을 궁궐에 침투시킬 필요가 없고, 자객을 침투시킬 수 있는 세력이라면 굳이 쿠데타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의 암살 작전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작전이다.
정조 당시의 노론당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옹립한다는 계획 하에 강용휘·전흥문을 암살 현장에 파견하는 데 그쳤다. 영화에서처럼 대규모 군대를 별도로 동원하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역린>에서는 을수가 이끄는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궁궐에 침투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침투한 암살자는 강용휘와 전흥문 둘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아주 공공연하게 정조의 처소에 접근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접근했을 뿐이다.
<역린>에서는 정조가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 채고 존현각 지붕 위에 군사들을 배치해 두었다고 했지만, 실제로 존현각 지붕을 장악한 것은 강용휘와 전흥문이었다. 두 암살자는 경희궁 대문 쪽에서 시작된 회랑의 지붕을 통해 존현각에 접근한 뒤 존현각 지붕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조가 수상한 느낌을 포착한 것은 두 사람이 회랑의 지붕을 걷고 있을 때였다. 존현각에서 호젓하게 책을 읽고 있던 정조는 회랑에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를 느꼈다. 그는 그 발자국 소리가 존현각 지붕으로 건너오는 것과 누군가가 지붕 기와를 들어내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자객의 침투를 확신한 그는 방문을 연 뒤 고함을 쳐서 사람들을 불렀다.
그날 밤 정조 옆을 지키던 내시는 존현각 주변의 경호 상황을 체크할 목적으로 잠시 존현각을 비웠다. 그 사이에 자객들이 존현각에 접근했던 것이다.
상당히 싱겁게 끝난 정조 암살작전<역린>에서는 경호부대와 암살자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전투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의 고함 소리를 들은 궁궐 사람들이 몰려오자, 강용휘와 전흥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무런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두 암살자는 밤새도록 궁궐 숲속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대문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갔다. 내부의 협력자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역린>에서는 암살 작전이 1777년 8월 30일 하루 안에 다 끝났다고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8일 뒤인 9월 7일, 정조는 경희궁의 경호 상태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로부터 5일 뒤인 9월 12일 전흥문이 또다시 창덕궁에 침입했다. 8월 30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노론당이 암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전흥문은 이번에는 정조의 처소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궁궐 담을 넘다가 체포된 것이다. 그만큼 궁궐 경비가 삼엄해져 있었던 것이다.
정조 암살작전은 정조를 죽이기 위한 노론당의 불타는 적개심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이 작전은 상당히 싱겁게 끝났다. 제1차 침투 때는 두 자객이 사람들을 보고 놀라 도주했고, 제2차 침투 때는 궁궐 담조차 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역린>에서처럼 대규모 반란군이 동원되고 궁중 활극이 벌어지는 사태는 결코 생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