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자신이 작품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이 발표하는 여러 작품들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작품 속 인물은 작가가 만들어내지만 그 이후에 그 인물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작가도 궁금할 것이다.
그 인물이 젊은 청년이라면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는지, 중장년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늙어서 노후를 맞게 되는지.
범죄소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범죄현장을 누비며 범인을 검거했던 탐정과 형사가 결국에는 은퇴해서 어떤 삶을 보내게 되는지. 더 나아가서 어떤 죽음을 맞게 되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고독한 스파이영국 작가 존 르 카레에게 그런 대상은 바로 조지 스마일리다. 조지 스마일리는 존 르 카레가 1963년에 발표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포함해서 여러 편의 작품에 등장한다. 존 르 카레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조지 스마일리의 마지막 무대가 바로 1979년 작품 <스마일리의 사람들>이다. 이 작품에서 조지 스마일리는 은퇴한 스파이이자 전직 영국 정보부장으로 등장한다. 젊은 시절 동유럽과 베를린을 누비면서 첩보활동을 했던 스마일리는 이제 은퇴해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평생동안 수많은 국경을 넘나들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가며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고 화목한 가정을 꾸린 것도 아니라서 그는 혼자서 살고 있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독거노인'이 되버린 셈이다. 스마일리도 '사회에 평생을 이바지했건만 남은 거라곤 나 자신뿐이군'이라며 중얼거린다.
그러던 어느날, 은퇴한 스마일리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과거에 자신과 함께 싸웠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망명자 '장군' 블라디미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빚을 갖고 있던 스마일리는 블라디미르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첩보전의 중심으로 복귀한다.
냉전시대에 벌어졌던 첩보전흔히 '냉전시대'라 하면 194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를 의미한다. 스파이는 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스파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냉전이 끝나면 스파이들이 할 일도 없어진다. 물론 요즘 세상에도 국가들 사이에 정보전쟁이 있지만 과거와 같지는 않다.
과거의 스파이들은 철저한 '유령'이었다. 여러 개의 이름과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든지 자신의 과거를 조작했다. 한곳에 정착해서 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이들은 거대한 이념의 충돌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스파이들은 첩보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이 발표된 것은 1979년, 이때면 냉전도 시들해질 쯤이다. 무료한 노후를 보내던 스마일리는 그래서 더욱 열심히 블라디미르의 죽음을 조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스마일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스마일리의 옛 동료는 스마일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렘린을 향해 달려가는 최후의 기사라도 되신 겁니까? 정신 차려요. 게임은 옛날에 끝났습니다"게임이 끝났더라도 그 게임에 투입된 인물들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퇴직한 스파이들도 적을 찾아 나선다. 존 르 카레는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인물에게 그에 걸맞는 적을 상대하게 해준다. 그야말로 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장대한 진혼곡이다. 동시에 냉전시대를 보내는 진혼곡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스마일리의 사람들> 존 르 카레 지음 / 조영학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