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원'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물은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본드는 잘 생긴 외모와 강인한 정신 및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다.
또한 최첨단 장비와 무기를 동원해서 멋진 액션을 선보이고 그 과정에서 매력적인 여성과의 로맨스가 생겨나기도 한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냉전시대의 실제 첩보원은 제임스 본드 처럼 화려하게 활동하지 않았다. 적진에 잠입해서 첩보 활동을 하다보면 매순간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때문에 이들은 자기 자신조차 속여가면서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했다. 여기에는 최첨단 무기도 없고 이성과의 달콤한 로맨스도 없다. 실제 첩보원들은 영웅도 아니었고 악당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냉전이 만들어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매력적인 여배우 앞에 나타난 남성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첩보원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첩보영화를 보면서 한 번쯤 '나도 저런 삶을 산다면 멋질 텐데' 라는 식의 상상을 해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동시에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나 긴장되고 흥분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활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일반인이 첩보원으로 선택된다면 그 방면으로 나름대로의 재능이나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최종 결정이야 그 당사자가 할 일이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바닥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에서처럼 멋진 이성을 만나게 될지.
존 르 카레의 1983년 작품 <리틀 드러머 걸>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 찰리에게 그런 기회가 다가온다. 찰리의 별명은 '빨갱이 찰리'다. 머리카락도 붉은 색이지만 그보다는 황당할 정도의 급진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는 영국의 한 극단 멤버로 활동 중이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는 배우다.
어느 날 찰리에게 중동에서 온 남성 '요제프'가 나타난다. 요제프의 매력적인 외모와 그가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린 찰리는 요제프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마음 먹는다. 여행과정에서 요제프는 중동의 정세와 관련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고 찰리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자 요제프는 찰리를 이스라엘 정보부 한 가운데로 데려간다. 빼어난 외모와 영리한 두뇌, 연기력을 가진 찰리를 첩보원으로 만들려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첩보전쟁
첩보원과 배우. 전혀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첩보원은 이중 삼중의 신분을 가지고 그때마다 그 신분을 연기해야 한다. 배우는 무대에 올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일반 회사원보다 배우를 첩보원으로 만드는 것이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작품 속의 한 인물도 찰리에게 말한다. 그동안 올랐던 무대 위에서의 연극이 아닌 더 큰 무대, 즉 현실에서 연극을 해보지 않겠냐고. 현실에서의 연극은 그만큼 힘들다. 장면이 마음에 안 든다고 까탈스럽게 굴 수도 없고, 아프다고 쉴 수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하는 것이다.
<리틀 드러머 걸>의 배경이 되는 역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인들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 끊이지 않는 곳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인들은 이곳을 가리켜서 '땅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 없는 땅'이라고 말한다. 첩보소설도 시대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흔히 말하는 냉전시대에는 동서냉전이 주요 배경이었던 반면, 냉전이 비교적 시들해진 80년대에는 중동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무대가 어디이건 간에 첩보원들의 삶은 마찬가지다. 삶이 아니면 죽음, 성공 아니면 실패인 극단적인 세상에서의 삶이다. 그러니만큼 그들은 그 안에서 갈등하고 고뇌한다. 자신의 진짜 신분과 정체가 무엇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작가 존 르 카레는 화려한 액션으로 장식되지 않은, 너무도 인간적인 첩보원들의 세상을 작품 속에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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