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탐욕이 부른 예고된 인재, 피해를 키운 무능한 대처, 오보와 왜곡, 망언으로 점철된 언론의 민낯은 피해 가족의 가슴에 매일같이 비수를 꽂는다. "치유를 말하기 전에 상처부터 주지 말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오마이뉴스>는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는 피해 가족들의 아픔을 생생히 기록하는 한편, 진정한 치유 방안을 고민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말] |
"사람들 기억 속에서 '세월호'라는 글자가 서서히 지워지나 봐요."세월호 침몰사고로 안산 단원고에 다니던 동생을 잃은 유가족 권오현(28)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전히 배 안에 실종자가 남아 있는데도 세상의 관심은 벌써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털사이트 주요뉴스 페이지를 가득 메웠던 '세월호' 소식은 어느새 6·4 지방선거 기사들로 '판갈이' 됐다. 브라질 월드컵이 시작되면 세월호 관련 뉴스는 더욱 묻힐 가능성이 높다. 심리 치유 전문가들은 "남겨진 사람들이 겪게 될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라며 "기억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치유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세월호 시민아카이브 네트워크'를 운영 중인 김익한 명지대 교수(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의 생각도 같다. 세월호 참사 추모 기록을 모으고 있는 그는 28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사고 원인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고립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민들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정부의 진상규명·책임자처벌 작업도 요원해질 수 있어요. 소홀히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어느 정도 사회적 관심이 있으니까 유족들이 여야에 면담을 요구할 수 있는 거죠. 월드컵 지나고 나면 가족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 질 수 있다니까요. 이러다 보면 언젠가 세월호 같은 사고는 또 나게 돼있어요."김 교수는 "시민들이 지지해주는 힘이 없으면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밝히는 일의 동력도 떨어지게 된다"며 "진상규명에 실패한 가족들이 좌절한 채 무력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시민들이 계속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남은 가족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잊지 않고 기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기록되면 기억된다... '세월호 기억저장소' 생긴다
김 교수는 우선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을 체계적으로 모으는 작업에 모든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록되면 기억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교수는 "기록이 남아 있으면 누구든지 보고 싶을 때마다, 봐야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다"며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가 '기록'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시민들이 적극 나서 '아카이브' 등의 기억 저장소를 만들어요. 미국발 금융위기 때는 시민들이 금융 위기에서 드러난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Occupy Archive'를 만들어 기록했어요. 보스턴 마라톤 참사와 관련해서도 'Our marathon'이라는 아카이브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사회적 기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현재 진도에 머물고 있는 김 교수 역시 조만간 안산으로 거처를 옮겨 '잊지 않기 위한 기록 작업'을 장기간 지속할 계획이다. 참사 희생자가 많은 고잔동에 연립주택을 임대해 유가족들과 함께 '세월호 기억저장소'를 운영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 김 교수는 5년 이상 머물며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삶을 오롯이 남겨두겠다는 생각이다. 가족·학교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희생자의 인생이 담긴 사진·편지·동영상 등을 받아 기록·수집하는 작업이다. 기억저장소 안에 '이야기카페'를 만들어 부모 등 유족들이 언제든지 와서 떠난 이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한다.
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기록도 이곳에 저장한다. 김 교수는 "정보공개청구운동과 국회의원을 통한 공공기록 수집으로 '가해자'들의 잘못을 밝혀낼 자료를 모을 것"이라며 "이 기록을 수시로 가족들에게 보여드려 '부도덕한 자본과 무능한 정부의 잘못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점을 확신시켜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희생자들의 사연과 진상규명을 위한 기록이 어느 정도 모이면, 온·오프라인을 통해 세월호 사고를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도 전개할 생각이다. 시민 누구든 기억저장소에 직접 와서 자료를 보거나, 홈페이지에 게재된 사진·영상을 열람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결국 기억저장소를 만드는 것도 이번 참사가 사회에서 절대 잊히지 않기 위해 하는 작업이에요. 서로 공유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개선책을 찾아나가면 어느새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겠죠."김 교수는 먼저 세월호 사고 실종자가 모두 육지로 돌아오면 시민들과 함께 기록수집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오는 8~9월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세월호 관련 전시회를 연다. 사진·편지·아이들이 남긴 유품 등을 전시해 다시 아픔과 반성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차원이다. 그는 "기억하기 위한 기록 노력을 계속 하면, 남은 가족들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레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안산 중심으로 '공동체 복원 운동' 전개해야
기록 작업과 더불어 남은 가족들 곁을 지켜주는 '공동체 복원 운동'도 중요하다고 김 교수는 제안했다. 유족들이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곁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안산 고잔동·와동에서만 단원고 아이들이 150여 명 정도 사망했어요. 동네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동네에 살면서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치유가 되겠어요. 동네 공동체 복원 운동이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피해 가족들이 아무 때나 모여서 대화 나누며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유가족들도 지금 같은 무력감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겠죠."이미 안산 시민·사회단체들은 지역 공동체 복원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40여개 단체들로 구성된 안산시민대책위원회는 5~1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심리치유·생활지원 방안을 마련해 유족들과 접촉하고 있다. 매주 주말마다 열리는 '추모와 진실 규명을 위한 촛불집회'도 유족과 지역 주민들이 언제든 참여해 서로를 보듬을 수 있도록 무기한 지속할 계획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남편 이명수씨 등도 안산으로 곧 거처를 옮겨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이들은 심리치유와 더불어 모금, 위로 편지 보내기 등 시민 참여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김 교수는 더 나아가 유가족들의 생활 복원을 위한 시민운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현재 남은 가족들이 생계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공동체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반실업 상태에 놓인 유족들을 위해 공동체가 일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다고 그는 제안했다. 협동조합을 세워 비정규직이 많은 안산 지역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한 유가족 어머니는 '집에서 밥을 못 해 먹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늘나라로 떠한 자식 생각을 하면 밥 먹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거예요. 이럴 때일수록 시민·사회단체가 고잔동이나 와동에 '밥차'를 마련해야 해요. 일종의 '먹거리 공동체'죠. 함께 손잡고 나와서 밥 먹고 힘 낼 수 있도록 시민들이 도와야 합니다."그는 세월호 사고의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최소 5년은 시민들이 유족과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월호 사고를 접한 많은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