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람들에게 바람은 오래된 이웃이다. 돌과 돌 사이로 난 빈틈이 바람에게 길을 내주고,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이 바람의 가슴을 쓸어주며 함께 산다. 바람의 안부를 늘 묻고 지내기 때문에 바람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일이 줄어든다.
선거를 이틀 앞둔 6월 2일, 제주도에서는 소소한 웃음을 머금은 소문 하나가 종일 섬 전체를 휘돌았다. 전날 서울에 간 새누리당 원희룡 제주도지사 후보가 강풍주의보 때문에 제주도에 돌아오지 못 했다는 소식이었다. 제주의 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진짜 제주의 아들들은 기본적으로 육지에 나가게 되면, 들어올 때 기상정보 꼼꼼히 알아보고, 집안 대소사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우며 자랍니다. 유세 약속 몇 개꽈. 갑자기 나가면 됩니까? 제주 사람을 가볍게 본 증거입주."선거유세에 준하였다는 문제의 출마 기자회견에서 "어머니, 제주의 아들…" 운운한 원 후보의 발언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원 후보가 참석한 행사는 새누리당의 '국가개조 결의대회'였다. 원 후보가 이 행사를 도민들과 약속을 무시할 만큼 중한 행사로 판단했다고 제주도민들은 받아들인다. 그 책임을 묻는 바람의 세기가 강했다. 말 그대로 '현지 정서'였다.
오랫동안 서울 시민이던 원 후보가 이 정서적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지 짐짓 걱정이 되었다. 사실 제주도민이 아닌 기자는 '도민 우롱'이라는 생각보다 '물에 빠진 아이들 수백 명을 방치한 정권이 누구를 개조하겠다고 시위야?'라는 생각이 앞섰다.
'원희룡 후보, 강풍주의보로 김포공항에서 발 동동'이라는 기사를 낸 지역 언론들은 이날 하루 종일 새정치민주연합 신구범 제주도지사 후보의 게릴라 유세를 보도했다. 신 후보는 제주시내 동문시장과 제주대학교를 찾아가 유권자들을 만났다. 그 사이 비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오후 2시 무렵 바람의 속도는 초속 10미터였다.
기자는 그 시간에 신제주의 원 후보 선거사무실 가까운 길을 지나고 있었다. 건물에 붙은 현수막들이 거세게 흔들리고, 비닐봉지들은 공중을 날고, 나뭇가지들과 함께 새 둥지가 길에 팽개쳐 떨어지고 새 새끼들이 사람들 발에 밟혀 죽어 있었다. 제주 바람의 실체를 처음으로 맛보았는데, 꽤 무서웠다.
강풍주의보가 잦아들고, 6·4지방선거 투표일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민주진보 성향의 언론조차 '원희룡이면 된다'는 새누리당의 주문에 걸려든 듯 신경을 쓰지 않는 제주도. 제주도 도지사 선거가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는 하루다.
바람이 불면 올 수 없는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꽃 속에 두 후보가 있다. 한 사람은 "특별자치도 완전 실현"이라는 강력한 자존 정책을 제시하고, 한 사람은 "중앙과 긴밀히 협력하여" 더 큰 제주도를 만들겠다는 능력을 과시한다. 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두 후보 모두에게 의구심을 갖는 눈치다.
"특별자치도 법은 정해진 지가 언제꽈? 여태 안 된 일이 도지사 손으로 실현될 수 있수꽈? 힘 있는 사람들 맘대로쥬.""4·3위원회 폐지 법안도 그렇고 뭐든지 당론이면 찬성하는 사람인데, 당론과 제주도 이익이 부딪칠 때 제주도 편 들 수 없을 거우다. 결국 중앙으로 갈 사람 아니꽈?"언론에 발표된 여론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 후보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유선전화로만 이루어진 여론조사는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의 이면이 흥미롭다.
결국 여론조사는 신뢰하기 어렵고 뚜껑 열어보아야 드러난다는 제주도 표심. 열사흘 불던 바람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궁금하다. 내 제주 지인은 "헤심드랑허게 놀당 4년을 후회한다"면서 남은 하루 동안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전화기에 불이 나게 뛰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