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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은 눈물 속에 살았다. 너무도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고 앞에서, 국민들은 정부가 무사히 이들을 구조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발생한 이 '사고'는 단 한명도 구하지 못한 '사건'이 되었고 마침내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맞이하게 된 6·4 지방선거. 일부의 사람들은 투표로써 무능한 현 정부를 응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 차라리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이는 무슨 확신처럼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우리들의 투표권에 대해 그 역사성과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며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부여된  투표권은?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의 투표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그리스에서 이뤄졌다. 당시 그리스 귀족회의에서 '아르곤'이라는 임기 1년의 집정관을 뽑기 위해 투표를 했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투표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 당시 투표권은 귀족에게만 있었다. 일반 시민 누구나 참여하는 온전한 의미의 투표가 아니었다. 투표의 기본 4대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사회 시험에 꼭 나오곤 했던 투표의 4대 원칙은 첫째, '보통' 선거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평등' 선거다. 재산, 성별, 학별, 직업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1인 1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 '직접' 선거다. 쉽게 말해서 투표는 누가 대리할 수 없고 본인이 본인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비밀' 선거다.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자신 이외에 누구도 알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제대로 서야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투표다.

한편 여성이 투표권 확보를 위해 싸워온 역사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눈물겹다. 전 세계에서 여성의 투표 참정권이 최초로 보장된 때는 1893년 뉴질랜드에서 였다. 참고로 민주주의의 대표 국가라고 말하는 영국의 경우 1918년, 미국이 그보다 2년 늦은 1920년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줬다.

소중한 한 표 행사하는 유권자 6.4지방선거일인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소중한 한 표 행사하는 유권자6.4지방선거일인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이처럼 뉴질랜드에서 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도입할 수 있었던 건 케이트 세퍼트라는 여성 덕분이었다. 여러차례에 걸친 좌절과 도전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는 술 판매를 금지하는 목적의 '기독교 여성 금주모임'을 만들고 이 조직을 중심으로 1891년부터 여성 참정권 확보를 위한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탄원서를 낸 때는 1891년이었다. 9000여명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는 간단하게 거부되었다.

그러자 세퍼트는 이듬해인 92년, 다시 2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두 번째 탄원서를 뉴질랜드 하원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원으로 올라간 이 안건은 끝내 보수적인 남성 상원 의원들의 방해로 법안 통과에 최종 실패한다.

하지만 세퍼트는 좌절하지 않았다.  다시 탄원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고 이를 위해 약 12만 여명으로 추정되던 뉴질랜드 내 백인 여성 중 1/4에 해당하는 3만명 이상을 상대로 서명을 받았다. 그 당시 지금처럼 전화도 없고 이동 수단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3만 여명의 서명을 받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집요한 노력 끝에 뉴질랜드에서 여성의 투표 참정권이 허용된다. 1893년 9월 8일이었다. 그날 뉴질랜드 의회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에 대해 20대 18, 불과 두 표 차이로 통과시킨 것이다. 단 한 사람만 마음을 바꿨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뉴질랜드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투표권을 주지 않은 이유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어처구니없는 논리였다. 어린이, 정신병자, 그리고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취급한 것이다. 그래서 "투표권을 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유럽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판단력 부족 중 하나의 예로 든 것이 "잘생긴 남자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성 유권자 역시 여자가 예쁘다는 이유로 투표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극히 일부의 현상을 가지고 투표권 자체를 전부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은 또 어떤가. 많은 분들에게 의외의 사실일 텐데 남성이라고 해서 모든 이에게 처음부터 투표권을 주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의 경우  만 21세가 넘은 남자중에서 특별한 경우에만 투표권을 줬다. '자기 집이 있거나 직업이 확실한 남자'가 그 기준이었다. 그래서 집이 없거나 안정적인 직업이 없는 남자는 투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 하찮게 여기는 투표권은 과거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일부 기득권층의 특권이었다. 이런 투표권을 소홀히 여기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투표 역사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투표가 처음 실시된 건 언제일까. 1948년 5월 10일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가 최초였던 것이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만 21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했다. 이때의 투표율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놀라운 수치다. 무려 95.5%에 달하는 투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우리나라에서의 투표 연령 변천 과정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된 1948년 5월 10일 투표 연령은 만 21세 이상 국민이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50년에 만 20세로 낮춰진 후 55년만인 2005년 만 19세로 낮춰졌다. 하지만 최근에 투표 연령을 만 18세까지로 낮춰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 지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고도 법정 투표 연령인 만 19세가 되지 못했다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은 문제라는 것인데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이는 외국의 투표권 행사 연령만 봐도 금세 그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18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투표 연령은 만 18세다. 여기에는 세계 주요 선진국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 호주, 캐나다,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다. 만 16세에 투표권을 주는 나라도 있다. 오스트리아, 니카라과, 쿠바 등 5개 국가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이다. 북한은 몇 살부터 투표권을 줄까? 답은 17세부터다.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수단, 동티모르 등 4개국이 포함된다.

소중한 한 표 행사하는 유권자 6.4지방선거일인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소중한 한 표 행사하는 유권자6.4지방선거일인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다. 만 19세가 돼야 투표 참정권을 주는 나라는 대한민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매우 부끄럽고 또 이해할 수 없는 행정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사례와 견줘봐도 그렇지만 우리 나라 행정 실태만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증 발급은 만 17세, 운전 면허 발급 18세, 공무원 임용 18세, 심지어 부모의 승낙없이 혼인을 할 수 있는 법적 나이 역시 남자는 18세, 여성은 16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족 투표할 수 있는 나이만 만 19세로 묶어 놓는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젊은 층의 투표를 두려워하는 보수 여당의 반대 때문이다. 야당은 이전부터 현행 19세 투표연령을 전 세계 다른 나라 기준에 맞춰 18세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못해 여전히 그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당신의 위대한 권리, 투표하면 이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여성의 투표 참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이들이 싸워 왔다. 남성 역시 누구나 다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재산이 없다면 투표할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만약 그런 이유로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내 것이라고 여기는 투표권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투표권을 지금처럼 쉽게 포기하고 방치하겠는가.

무엇보다 투표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위대한 권리'이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이들이 청와대 앞으로 진출하여 무능한 대통령을 비판한다며 행진하다가 경찰에 의해 매주 연행되고 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분노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용기있는 분들의 행동에 경의를 표한다. 마찬가지로 투표 역시 그런 용기있는 '또 다른' 행진이다.

분명한 사실은 투표하면 세상은 바뀐다는 것이다. 무능한 대통령과 여당에게 '물러나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지만 투표하면 정말 물러난다. 그것이 바로 투표가 가진 힘이다. "이 놈이든 저 놈이든 다 똑 같으니 난 투표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웃는 이는 '진짜 뽑혀서는 안 될 나쁜 정치인'일 텐데, 그래도 정말 좋단 말인가.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우석이 공안 경찰 차동영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외쳤다. 바로 그 송우석이 외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나온다'는 말은 바로 '투표를 의미한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이 가진 이 투표권을 두려워한 독재자 박정희는 1972년 '유신 헌법' 선포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고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간선 제도로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그래서 단독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를 상대로 여당 지지자인 대의원이 찬반 투표로 대통령을 뽑아 사실상의 총통제를 한 것이다. 박정희를 이어받은 전두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후 이 제도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야말로 민주주의가 말살된 시대였다.

이 빼앗긴 투표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것이 바로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뜻과 달리 전두환은 개헌할 시간이 없으니 현행 제도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고 했고 후임으로 노태우를 지명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이 6월 10일을 디데이로 시위에 나섰고, 불행하게도 그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사전 결의대회에 참여한 이한열 열사가 진압에 나선 경찰의 최류탄에 피격되어 숨진 것이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이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치열하게 투쟁해 마침내 얻어낸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진 '투표권'인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고 있는 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웠는지 생각한다면 어찌 이 투표권을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명심하라. 당신의 투표할 권리를 위해 싸워온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투표는 당신의 '위대한 권리'다. 행사하라. 반드시.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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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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