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 없다
그는 낯설었다. 다섯 번쯤 봤는데도 여전히 그랬다. 얼른 파악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히기 쉬운 법이거늘 그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한 움큼씩 조심스러운 호감이 일렁였다.
지난해 11월, 파리 부정선거 규탄 집회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숲에서 방금 나온 그리스 신화의 남신 같았다. 스물넷의 청년이었지만, 열여덟 정도에서 나이가 멈춘 듯한 미소년이었고, 이 거친 세상에 발 딛고 우리와 함께 서 있지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 없었다.
이예다. 1991년생. 2년 전 여름, 파리에 처음 왔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 자격을 획득한 첫 한국인이다.
유병언은 정치적 망명을 거절 당했다지만, 이예다의 양심과 군대를 강제하는 한국 정부의 상황은 그에게 난민 자격을 허락했다. 지난해 5월 난민 자격을 획득하고, 10년짜리 체류증을 얻은 지 1년 남짓. 지금 그는 베이글 전문 가게에서 일한다. 난민 신청자의 숙소를 나와 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불어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그의 파리에서의 삶은 이제 막 뿌리를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프랑스 땅을 밟은 사유에 관심이 있는 만큼, 당에서 일하던 시절 어깨 너머로 배운 더듬이로 그를 관찰해 보았다. 그가 속했던 집단을 통해 사람을 분류하고 파악하는 그 못된 방법은, 직관이라곤 쥐뿔도 없는 수컷들이 만들어낸 어줍잖은 방식이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다는 특정 종교를 가진 것도, 성소수자도 아니며, 소위 학생 운동권에 몸담으며 선배들의 말씀에 세뇌된 흔적도 없다. 그가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말 그대로, "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가 없다"는 것. 이것만이 그가 군대를 거부하고 난민이 되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토록 결연하게 평화를 지양하는 그의 양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지난 5월 31일 예다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군 복무 거부하면 범법자 취급... 폭력적 시스템
- 언제부터 생명체를 죽일 수 없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나? "중1 때. 일본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었다. 그것을 읽으면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이 처음 생겨난 것 같다.
그때부터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면서 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을 이유 없이 죽일까에 대한 긴 고뇌가 시작되었다. 모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즉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방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주변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습관처럼 죽인다.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무 이유가 없다'였고, 그래서 죽이지 말자고 결정했다. 생명이니까. 나한테 그 생명을 단절 시킬 권한이 없으니까. 그때부터 내 앞에서 파리 한 마리라도 죽이는 사람이 있으면 예외 없이 물었다. "왜 죽여?" 그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대부분은 그런 질문에 황당해 한다. "그러게, 내가 왜 죽였지?" 혹은 적극적으로 자기방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고, 우리를 귀찮게 하고 방해하는 다른 종이 있으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모기에 물리면 가렵고 따갑지만, 우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모기를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정 귀찮아지면 손으로 모기를 살짝 포위해서 창밖에 놔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난민들을 위한 시설에서 지낼 때 빈대를 만났다. 처음에는 견뎠다. 그런데 그것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빈대와 함께 지내다 보니 남들과의 신체 접촉도 꺼려졌다. 내가 그들에게 빈대를 옮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건 나에게 정말 큰 피해를 주는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 하고 빈대를 죽였다. 약까지 사다가 철저하게. 10년 만에 처음으로 살생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사람 만난 적 있나? "아니, 없다. (둘 다 웃음)"
- 그럼, 총을 들 수 없다고 느낀 것도 바로 그 마음의 연장선이었나? "그런 셈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 선생님을 통해 정치의식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이러저러한 집회에도 참가했다. 거기서 의경을 보았다.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미국을 위해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게 내가 본 우리 군대였다. 나라를 지킨다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 정치적 도구로 이용 당하는 조직이라고 보았다. 거기서 총을 들고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군 복무를 거부하면 범법자로 취급당하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그 폭력적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유학을 가든 이민을 가든, 나라를 떠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런데 당신이 선택한 방법은 (적어도 당분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럴 때 가장 걸리는 건 사실 가족이 아니던가? "부모님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좀처럼 이해해주지 않으셨다. 정치적 신념을 갖는 건 좋지만, 해야 할 의무들을 모두 행하고 나서 펼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군대라고 하는 폭력적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거기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폭력에 동조하는 거다. 내가 군대에 가서 의문사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하실 거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런 일이 있어도 군에 대해 아무런 요구도 못 하실 거라고 답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지셨다. 어느 정도 내 논리에 수긍하시고, 서로 편하게 연락하며 지낸다. 내가 좀 더 정착하면 여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이 여기로 오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집안 환경이 각별히 좋은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좋은 조건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계기를 찾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새로운 언어도 배우고, 다른 문화도 접하고.
더불어 병역 거부가 난민 허가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환기할 수 있다면, 군대를 당연한 의무로만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 이렇게."
- 하필 프랑스라는 나라를 택하게 된 이유는?"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도 알아봤다. 그러나 인권 문제에서 한국보다 나을 게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고 바로 접었다. 그러곤… 일단 군대가 있더라도 징병제가 아닌 나라,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야 하니까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의 난민 신청을 받아줄 만큼 정치적으로 열려 있는 나라 중에 선택해야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여름이 있는 나라여야 했다. 북유럽이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지만 추운 나라는 싫었다. 그러고 나니 남는 나라가 프랑스. (웃음)"
- 군대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한국을 떠났을까? "아마도. 고등학교 때 집회에 여러 번 참가했다. 한미FTA, 광우병 쇠고기, 이주노동자, 그리고 용산참사…. 시위를 하고, 사람들이 죽어도 바뀔 가능성은 적어 보이고…. 한국은 슬픔을 주는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 왔더니?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는 편이다. 예상한 대로 이런저런 복지제도들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첫 1주일은 한국 민박집에서 머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다. 난민 신청자들을 도와주는 기관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나 같은 난민 신청자들에게 불어를 공짜로 가르쳐주는 분을 만나서 불어도 배울 수 있었다."
- 아? 어디서 불어를 가르쳐주었나? "엠마누엘 선생님이라고, 시민단체(Kolone : 난민 신청자, 이민자 자녀 등을 돕는 시민단체)를 운영하시는 분이 계시다. 티베트, 방글라데시, 이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나 같은 청년들이 그곳에서 만나서 함께 불어를 배웠다.
불어 수업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 예컨대 숙소와 식사를 공짜로 해결할 수 있는 곳 등등 많은 것들을 도와주셨다. 거기서 불어를 배우면서 귀가 빨리 열린 편이다."
- 노숙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노숙한 적이 있긴 하지만, 통틀어서 1주일이 채 안 된다. 공항에서 노숙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며칠 되니까 비행기 표를 보여 달라더니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공원에서 노숙하고. 프랑스에는 나처럼 집 없는 사람들을 재워 주는 숙소가 있다. 거기서 여러 번 잤다. 매일 전화를 해서 신청해야 하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나중엔 엠마누엘 선생님이 매일 전화하지 않아도 가서 잘 수 있는 숙소를 알려주셔서, 또 거기서도 잤고. 난민 신청자들을 위한 공동 숙소에서 머물기 전까지는 그렇게 지냈다. 여기저기 도와주는 기관들을 알아보고 다니다가 만난 루마니아 친구 앙드레가 정보를 많이 알려주었다. 어디를 가면 밥을 공짜로 주는지 등등. 청소년 쉼터(Halte Jeune), 마음의 식당(Restaurant du Coeur) 이런 데서 밥을 먹곤 했다."
- 만약 난민 허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신청하고, 또다시 신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숲 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었다."
쌀 한 톨의 소중함, 나무의 기운을 깨닫게 해준 선생님, 선생님 - 인생에서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인 것 같다.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바로 부임하신 분이었다. 우리에게 쌀 한 톨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우리 앞에서 급식 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국물 한 방울까지 다 혀로 핥아 드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다.
그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나한테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후 나 역시 음식을 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중1 때 만난 문홍만 선생님. 담당 과목은 체육이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분은 철학 선생님이셨다. 체육 시간에 뒷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셔서 나무를 보고, 안게 하고, 나무의 기를 느끼게 하셨다.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중2 때 김철언 선생님, 중3 때 조남규 선생님도 좋은 영향을 많이 주셨다. 김철언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셨는데 농사를 짓기도 하셨고, 조남규 선생님은 국사를 가르치시는 전교조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다."
- 프랑스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많았나, 나쁜 사람이 많았나.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 땅에 당도하는 첫 한 해 동안 사기꾼도 만나고, 험한 꼴을 몰아서 겪기 때문이다. 1년간 환상이 깨지고 호되게 손해도 보면서 이런저런 홍역을 치르고 나면, 비로소 면역이 생기고 그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 지구력을 획득하게 된다.)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먼저 엠마누엘 선생님. 그리고 처음 머물렀던 한국 민박집 주인분들도 내가 직접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 내 사정을 다른 분들에게 들어 아시고는 일 주일에 한 번씩은 들르라고 말씀해 주셔서 종종 찾아뵙고,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었다.
난민 자격을 부여 받기 위해서 서류를 제출하고 인터뷰도 해야 하는데, 인터뷰를 잘할 수 있도록 난민지원단체에서 모의 인터뷰를 사전에 했다. 그때 그 민박집의 아들인 분이 통역을 해주셨다. 완벽하게. 실제 인터뷰 때는 한국어를 하는 프랑스 분이 난민사무국의 주선으로 와서 통역을 해주셨다. 나중에 그분한테 들었는데, 처음 서류심사 때 나는 탈락자로 거의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모든 게 뒤바뀌었다고 했다."
난민사무국을 감동 시키다
- 대체 뭐라고 얘기했기에...? "있는 그대로. 내가 왜 군대를 거부하는지. 한국 군대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내가 군대를 거부하고 한국에서 계속 살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나중에 그분을 따로 만난 적이 있다. 마리-오랑즈라는 분인데, 함께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실은 나 역시 그 프랑스 통역사가 예다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바 있다. 그녀는 예다라는 청년의 존재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고, 그의 영민함에 감탄했다. 난민사무국에서 인터뷰가 있던 그 날,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예다에게 예정보다 빠른 속도로 난민 자격을 주었던 것도, 그날 모든 사람들이 예다라는 청년에게 받았던 감동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녀는 예다를 보며, 그의 삶을 함께 책으로 적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바로 느꼈다고 했다.
- 지금 일하는 베이글 전문 가게의 일자리는 어떻게 구했나? "난민 자격을 얻고 일자리를 구하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난민구호센터에도 갔는데, 내가 찾아갔던 그때 우리 가게의 주인이 그 센터로 구인 신청 전화를 한 참이었다. 나는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거기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채용된 지 지금 10개월이다."
- 일은 재미있나? "괜찮다. 일단 주인이 괜찮은 사람이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반죽만 했다. 그때는 정말 힘들고 재미도 없었는데, 지금은 반죽이 된 것으로 빵 모양을 빚고 판매도 하고 커피도 내린다. 케이크 만드는 것만 아직 못 배웠다. 요즘은 손님들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한다. 주인과도 서로 신뢰가 많이 쌓여서, 어쩌면 조만간 매니저 일을 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앞으로의 계획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선생님이 되는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다. 엠마누엘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협회에 함께 일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늘 사람이 부족하다. 내가 불어를 가르칠 수 있다면 옆에서 엠마누엘 선생님을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지금 배우는 제빵 기술을 토대로 자격증을 딸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응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늘 마음속에 귀농에 대한 꿈이 있다.
생명을 훼손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결국 내가 직접 농부가 되어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방식이 제일 좋을 것 같다는 데로 생각이 간 것이다. 좀 더 해가 많은 남쪽으로 가서."
예다가 일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그가 일하는 베이글 전문 가게를 찾았다. 파리에 베이글 전문 가게가 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과연 그러했다. 마침 사장인 요한이 막 가게를 나서던 참이었다. 젊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캐나다 출신의 프랑스인인데, 프랑스에 베이글 전문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북미 스타일 그대로 베이글을 만드는데 반응이 좋단다.
예다가 당신이 좋은 사장이라던데, 라고 묻자, 요한은 "뭐… 그러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밝게 답한다. 가게에 들어서자 예다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요한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주라고 미리 말해 놓았단다. 치즈 케이크가 먹음직해 보여서 염치불구하고 한 조각 먹었다.
베이글도 제대로 맛을 낼 뿐 아니라, 치즈 케이크는 예술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다. 예다는 난민센터에서 만난 루마니아 친구 앙드레도 취직 시켰다. 남을 돕기만 할 뿐 좀처럼 누구한테 도움을 받지는 못하는 그를 안타까워하던 예다가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다.
한 달 생활비 50유로, 그렇지만 풍요로운 삶
일 주일에 닷새를 일하는 베이글 전문 가게에서 예다는 월급을 받을 뿐 아니라 세 끼를 모두 해결했다. 정규직이다. 대중교통 정기권을 할인받기 때문에 단돈 16유로(약 2만 2천 원)면 한 달 교통비도 해결된다.
과일을 좀 사고, 쉬는 날에는 집에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벼룩시장이나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보고, 다른 사람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을 때 포도주 한 병을 사가는 정도가 그가 쓰는 돈의 전부다. 집세를 제외하면 50유로(약 7만 원) 정도로 한 달을 산다. 나머지는 저축한다. 지하철에서 집까지의 40여 분 동안 책을 읽는다. 지금의 삶에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에 두고 온 보고 싶은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
순간, 그가 사랑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의 청춘이 드디어 자신이 선택한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듯하였으나 사랑으로 뛰는 가슴을 갖지 않은 청춘의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지만 감히 물어볼 순 없었다. 그런데 마침 내게 그가 묻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한때 연인이었으나 헤어진 사람,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단다. 존경스러운 존재였던 그 사람 앞에 부끄러운 자신이 되고 싶지 않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병역 거부에 대한 신념을 난민 신청이라는 실천으로 옮기게 된 동기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최근에 다른 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번져가는 걸 느낀다고 했다.
첫 번째 사랑이 아무리 진실해도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 그것이 예다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답해 주었다.
인터뷰 중, 측면으로 앉은 그를 바라보다가 약간 작아 보이는 듯한 그의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지난 몇 달 사이 살이 좀 찐 것 아니냐. 어깨 부분이 꽉 끼는 것 같다"고 하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몇 달 동안 반죽을 하다 보니 어깨 근육이 발달해서, 지금 입고 다니는 옷들은 어깨 부분이 다 끼게 되었다"고.
스물네 살의 청년 예다의 삶은 이제 건강한 노동과 그것이 변화시키는 신체, 뺨을 물들이고 가슴을 크게 뛰게 만드는 사랑들로 알알이 들어차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지난 2년간 점점 우경화하는 프랑스 땅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 거친 일들, 험악한 인간들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조차 마음을 건넬 줄 아는 그이기에, 그 어떤 악한 기운도 기를 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을까.
굳이 계보를 찾아보자면, 그는 한국의 공교육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스스로 증언했듯이, 그의 인생에 방향을 제시하고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해준 사람들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이었다.
그가 행운아였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말을 생명수처럼 받아먹고, 영혼을 살찌우며, 그 모든 가르침들을 삶에 녹여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제자를 둔 그 선생님들. 이 구제할 길 없는 입시교육의 지옥에서 천국의 한 자락을 발견할 줄 알았던 제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그들이 더 큰 행운을 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조금 더 다가서게 된 예다의 낯설음의 정체는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함이었다고나 할까. 비범함을 가장한 평범한 인간들의 숲에 둘러싸인 세상에 그는 평범한 옷을 골라 입고 서 있었다. 그 속엔 황금의 깃털들을 가득 감추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