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를 옮기게 됐다. 전 직장보다 노동 조건이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맡은 일이든, 동료 간의 우애든, 일터의 가치 지향 면에서 볼 때는 전보다 아주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됐다. 그래도 5년 넘게 일한 일터를 옮긴다는 게 마음이 참 힘들었던 모양이다. 퇴사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또 이직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두어 달 사이에 몸무게가 눈에 보이게 줄어들고 간 수치는 올라갔다.
담당의사는 그동안 먹던 간 치료제의 양을 늘려서 처방했다. 이렇게 몸도 맘도 고단하면 더는 못 살 것 같은 기분. 그래 내 나이 쉰, 이 나이면 살아간다는 건 죽어간다는 것과 동일어인 거지.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해도 맘의 평정을 찾기 어려웠다.
5년 만에 옮긴 직장, 그런데 눈이 왜 이러지?새 일터는 월간지를 만드는 출판사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마감이 시작되었다. 원고 교정을 보는데 눈이 시리고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마구 흔들리기에, 이상하다고, 내 몸과 맘이 고돼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늦은 퇴근길, 안과는 문을 닫았을 테니 시력이나 재보자 싶어 안경점엘 갔다. 증상을 얘기하고 검사를 한 결과 아, 노안이란다. 으아! 이날 입때껏 시력 하난 좋다고 자신만만했더랬다. 지난 연말에 건강검진 할 때도 시력이 1.2, 1.5가 나오기에, 내 몸에 멀쩡한 기관은 눈뿐이라고 깔깔대며 좋아라 했다. 헌데 시력이 나빠진 것도 아니고, 나이 들면 온다는 노안이라니… 케겍! 오우, 노우~!
돋보기를 맞추라는 안경사의 말에 참담한 심정이 되어 싸구려 안경테를 하나 골랐다. 그래야 당장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이제 와 생각하니 첫 안경인데 기분이라도 풀게 좀 폼 나는 걸 맞출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내가 노안이라 안경을 쓰게 됐다는 얘길 들은 후배 하나는 "노안(老眼)이라 쓰고 노안(老顔)으로 읽는다"며 날 놀리더라. 나 역시 안경을 쓰면 이 미모가 가려져 어쩌냐며 우스갯소릴 했지만, 얼마나 기분이 착잡하던지. 갑자기 한 십 년은 더 늙어진 기분….
마감 내내 돋보기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돋보기를 쓰면 글자는 크고 또렷하게 보이는데 어질어질한 거다. 눈앞의 원고는 돋보기를 쓰고 보는데, 컴퓨터 모니터는 콧방울까지 안경을 내리고 눈은 치켜뜨고 봐야 한다. 계속 반복해서 그런 작업을 하려니 어찌나 머리가 띵하고 피로한지 눈동자는 빠질 듯이 아프고….
새 업무에 적응하느라 힘든데 거기에 이런 몸의 증상이, 더군다나 나이듦의 대표적인 증상이 나타났다는 게 울적했다. 우울했다. 서글펐다. 착잡했다. 슬펐다. 씁쓸했다. 뭐 아는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내 맘을 표현하기 어렵다. 노안은 시력과 상관없다고들 하고, 나이 들어서 그런 거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 하는 친구들 얘기도 있었지만 위로가 되질 않았다.
울적, 우울, 착잡, 씁쓸... 나이듦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내 마음
내 맘을 들여다봤다. 노안이 슬픈 것이 아니라 내가 늙어간다는 게 서글픈 거였다. 몇 년 전 산부인과에 자궁암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날더러 피임을 어떻게 하고 있냐고 물었다.
"피임할 일이 없는데요. 깔깔.""호호호, 그래도 피임을 하세요. 앞으로 몇 년 안 있으면 폐경할 텐데, 그때까지 루프 끼시면 되겠네요."헉! 폐경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지적하며 의사에게 잘난 척할 수는 없었다. 맘에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이렇게 충격을 주나? "몇 년 안 있으면"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동안 생리할 때마다 그렇게 귀찮고 힘들기만 했는데 앞으로 몇 년 안 남았다고 하니 어째 맘이 뒤숭숭하고 아쉬웠다.
많은 여성들이 갱년기를 맞아 완경을 하면 우울해지고 몸이 아프고 그런다고들 하더라. 남편이 곁에 오는 게 싫어진다고 하더라. 이제 내가 그런 나이가 돼가는구나 생각하니 슬퍼졌다. 난 언제까지고 사랑하는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고, 또 그렇게 살고 싶은데…. 완경이 사랑을 식게 할 거라는 상상은 하기도 싫지만 그게 나이가 들어가는 내 몸의 자연스러움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나이 쉰을 앞두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내 나이를 알아차리고 여성호르몬에 이상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할 즈음 <여자로 나이 든다는 것>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 등, 나보다 먼저 나이가 든 이들이 일러주는 지혜, 잘 늙어가는 여러 얘기들을 풀어놓은 책들을 읽으며 나도 잘 늙어갈 준비를 해오던 터였다.
허나 그렇게 '나이듦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노안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은 몇 년 전 내가 여자로서 몸의 기능이 다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보다 더 심경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평소 종합병원이라는 내 몸 가운데 가장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눈이라서 그런가 싶다. 하긴 그렇게 멀쩡한 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눈이 안 좋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을 만난 것, 사람 보는 눈도 없지. 어찌 그런 무심한 사람을 만났을까 싶었을 때, 내 눈이 나쁜 것을 알게 됐는데….
그나저나 나이 들면서 점점 더 눈이 나빠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흐려질까 걱정이다. 하긴 요즘 나랏님이 하는 일들이 심봉사도 눈 뜨게 할 깜짝 놀랄 '쑈! 쑈! 쑈!'들이라 절로 눈 부릅뜨고 살게 되니 눈이 흐려질 염려는 없을 듯하다.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평생 늙지 않을 것 같던 내가, 아직도 마음은 사춘기 감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내가, 여전히 소녀 가장(?)인 내가, 슬프게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몸으로 먼저 알아차리게 되다니 정말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돌봐야 할 십대인 딸도 있는데, 몸도 맘도 약해져서는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