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7월 18일 오전 8시 14분]13시간 만에 오른 설악산 정상 대청봉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설악산 정상 대청봉 올랐다! 내 생애 일곱 번째 오른 설악산 정상이다. 과연 '악(嶽)'자가 붙은 산답게 '악' 소리가 난다. 아침 6시 설악동을 출발한 지 무려 13시간이나 걸려 오후 5시께 대청봉을 밟았다. 나이가 들수록 산행 속도는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설악산이 좋다! 정말 설악산이 좋아 나는 설악산을 오른다. '나는 산이 좋더라'라고 노래한 진교준의 <설악산 얘기>처럼 나는 설악산이 좋다. 설악산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진교준 시인의 <설악산 얘기>라는 시 한 구절은 기억하리라.
"나는 산이 좋더라/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나는 산이 좋더라/멀리 동해가 보이는/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진교준, <설악산 얘기> 중에서)한국전쟁의 격전지기도 했던 설악산은 한때 해골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곳을 고교생 신분으로 학교수업에 무단결석을 하며 찾은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진교준(1941~2003)시인이다.
10대 소년이었던 진교준은 설악산의 대자연과 자유에 매료돼 학교수업을 포기하고 서울을 탈출, 설악산을 섭렵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설악산 얘기>라는 시를 지어 경희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당시 국어교사였던 조병화 시인이 그의 작품을 장원으로 당선 시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교준은 정말로 설악산에 환장한 소년이었다. 그가 얼마나 설악산을 사랑하고 좋아했는지 그의 시를 음미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설악산 얘기>는 오늘날까지 설악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이 술자리에서 노래 대신 구전되는 전설적인 설악산 시가 됐다.
"산에는 물, 나무, 돌…/아무런 오해도/법률도 없어/네 발로 뛸 수도 있는/원상 그대로의 자유가 있다/고래 고래 고함을 쳤다. 나는/고래 고래 고함을 치러/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른다…."산에 오르면 그 어떤 오해도, 법으로 제한된 규칙도 없다. 그곳엔 대자연이 있고 자유가 있을 따름이다.
설악산 정상에 올라선 순간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만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그곳에는 웅장한 산맥과 나무·돌·물, 그리고 넓은 동해바다와 끝없는 허공만 있을 뿐이다. 이 창창한 웅지를 그 어디에 비기겠는가? 북으로는 금강산을 바라보고, 동으로는 원대한 동해의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영봉들이 줄기차게 뻗어 내려간 웅지는 과연 인간의 존재를 압도하고 만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산에는/파아란 하늘과 사이에/아무런 장애도 없고/멀리 동해가 바라 뵈는 곳/산과 하늘이 융합하는 틈에 끼어 서면/무한대처럼 가을하늘처럼/마구 부풀어 질 수도 있는 것을…."정상에 올라서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모든 것이 무한대로 뻗어있다. 산줄기도 하늘도, 동해바다도 무한대로 뻗어 있다. 히말라야 설산을 트레킹도 해보고, 안데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오르기도 했지만, 이곳 설악산에 오르면 사뭇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설악산만이 가진 그 무엇이 늘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공룡의 등뼈처럼 웅장한 공룡능선, 내외설악을 연결하는 마등령, 귀때기 청봉, 화채봉, 대승령, 나한봉, 장군봉, 칠성봉…. 이 웅장한 산자락 앞에서는 인간의 존재는 한 없이 작아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강하고 오만한 사람일지라도 이 거대한 산줄기 앞에 서면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험준한 영봉을 고대 승려들이 이렇다 할 등산장비도 없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종교적인 의지와 고행 정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고산준령을 오르내리는 고행으로 자신을 버리고 겸손을 익히는 수행을 했던 것이다. 정말로 산이 좋아 산을 오른 사람들이다.
인증샷 자리 쟁탈전 벌어지는 대청봉그러나 지금 대청봉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해발 1708m 대청봉'이란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치열한 자리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설악산 정상 표지석 앞에서 한 번도 아니고 수차례 사진을 찍는다. 독사진, 단체사진, 친한 친구와 함께 그리고 다시 독사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인증 샷은 단 한 번만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좀 더 멋진 인증 샷을 찍기 위해 수차례 찍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10여 명이 속한 단체가 표지석을 점유하면 10~20분 넘게 비켜주지 않고 수십 컷의 사진을 찍는다.
어떤 사람들은 표지석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이들을 어찌 산을 좋아하는 어진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옆에 '요산요수'(樂山樂水)라 적힌 표지석이 무색하기만 하다.
평일인데도 이렇게 정상에 등산객이 많은데 휴일 날 대청봉 정상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아마 기다리는 시간이 한나절이 될지도 모른다. 대청봉 표지석을 열 개 정도는 더 세워 놓아야 여유가 좀 생길까? 아무튼 우리 차례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보게, 여기 '양양이라네!' 표지석에서 한 컷 찍고 그만 내려가세.""허허, 그러세. 여기가 더 멋지고 좋은데."'대청봉' 표지석과 '양양이라네' 표지석이 무엇 다를 게 있겠는가. 우리는 '양양이라네!'란 표지석 앞에서 설악산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와 정상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중청을 거쳐 소청대피소에 내려오니 용아장성릉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용의 이빨처럼 솟은 바위들이 마법의 성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점점 깊어가는 <설악산 얘기>능선에 떨어지는 노을이 과히 환상적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단 한 번뿐이다. 날씨와 계절, 산을 오르는 시간 그리고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용의 이빨처럼 으르렁거리는 기암괴석에 떨어지는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설악의 아름다운 풍경을 늦도록 바라봤다. 계곡에 어둠이 깔리자 이윽고 하늘엔 총총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곧 잡힐 것만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소청 산장을 서성거렸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에 하늘과 산, 나무, 야생화, 그리고 설악의 품에 안긴 사람들의 <설악산 얘기>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다. 저 반짝이는 별 속에 <설악산 얘기>를 노래한 진교준 시인도 잠들고 있겠지. 그는 가고 없지만 <설악산 얘기>는 설악산 계곡마다 그리고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백담사 내려가는 길에 해골이 있다고 했다/해골을 줏어다가 술잔을 만들자고 했다/해골에 술을 부어 마시던 빠이론이/한 개의 해골이 되어버린 것처럼/철학을 부어서 마시자고 했다/해·골·에·다·가…."해골에다가 철학을 부어 마자고 하다니…. 고등학생인 소년의 마음속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대담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과연 시공을 초월해 천재적인 감수성으로 설악산을 사랑하고 노래한 시인이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용아장성릉이 거대한 해골처럼 보인다. 그 기암괴석 사이로 <설악산 얘기>가 전설처럼 들려온다.
5월의 소청산장은 겨울처럼 춥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만약에 술이 있다면 저 용아장 해골 술잔에 부어 한잔 죽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술이 들어가면 속이 덥혀질까? 나는 이빨을 덜덜 떨며 소청 산장 좁은 공간에서 담요 한 장을 덮고 <설악산 얘기>를 읊조리다가 칼잠을 청했다.
"나는 산이 좋더라/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나는 산이 좋더라/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설·설악·설악산이 좋더라…."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천불동계곡을 통하여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 오른 기행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