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시민기자는 울산 동구의 마을 도서관, 꽃바위작은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을사람 누구나 오순도순 소박한 정을 나누는 마을 사랑방 같은 작은도서관.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
저는 울산 동구에 있는 꽃바위작은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아침부터 시끌벅적 도서관이 소란스럽습니다. 자원봉사 어머니들이 지역의 다른 공공도서관으로 동화구연 봉사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책을 직접 만들어 그림과 색채를 더해 새로운 형태의 책을 만들고, 이것을 활용하여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한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도서관에서 시작된 구연동화팀, '빅북구연팀'은 자원봉사 어머니들의 남모르는 시간과 노력이 더해진 덕분에 인근 지역의 도서관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어느새 인기와 유명세 탓에 늘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지요.
다른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책상만 한 큰 책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보는 재미, 듣는 재미를 전해주고자 시작했던 일이 지금은 부담스러울 만큼 많이 알려져 있어, 사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다고 엄마들은 하소연합니다.
"감기에 걸려 목이 쉬었는데, 오늘은 호랑이 역할 못 한다. 니가 해라." "갑자기 호랑이가 와아 감기 걸리노? 호랑이 고놈 허약체질인가 보네." "감기가 아니고, 혹 어제 저녁에 시원한 거 한잔 하는 바람에 목이 부은 거 아이가?" "고건 아이다. 정 안 되믄 감기 걸린 호랑이라도 함 해볼까?" "그래. 그래야겠다. 지금 역할 바꾸는 건 안 되겠다. 안 그래도 한 명 빠지가 사서샘까지 역할 해야 할 판인데, 감기 걸린 호랑이~ 괜찮다. 아~들한테는 호랑이가 감기 걸렸다고 사실대로 이실직고 하지 뭐. 흐흐." 평소 호랑이 역할을 하던 자원봉사자 엄마가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장 약속된 동화구연을 하지 못할 상황에 빠진 엄마들끼리 서로 역할을 정하면서 이렇게 아침부터 한바탕 웃어봅니다.
"호랑이 고놈 허약체질인가 보네"... 웃음 끊이지 않는 엄마들
"빨리 빨리 준비하입시더. 오늘은 무슨 책 가져가노?" "지난번에 '팥죽할머니' 했으니 이번은 '두루마리책' 가져가요." "아~들한테 줄 책갈피도 좀 챙기고 얼릉 가입시더." "이러다가 우리 도서관 꺼 다 퍼주는 거 아이가?" "퍼줄 수 있을 때 퍼주자. 우리 도서관은 또 새로븐 거 맹글어야제." "맞다. 그 말엔 나도 동의한데이." "오늘도 아~들이 쫌 있어야 할 낀데, 그래야 우리가 쪼매 힘나지. 안 그런가요?"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나요? 마아 편하게 생각하입시더. 한 명이라도 있음 그저 고마울 따름 아인가베." "맞다, 맞어." 동화구연 엄마들은 연령대가 비슷비슷하다 보니 친구 같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친구보다 더 편한 사이가 되었지요. 한 달에 한두 번은 저녁에 꼭 만나 밥을 먹고, 못다 한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때가 많으니 당연히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라고 해도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지는 건 아닙니다. 분위기에 따라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더 재미나고 흥미로운 일들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나름 얘기 나누다 보면 뜻하지 않게 괜찮은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많습니다.
도서관이 자원봉사 엄마들로 항상 북적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봉사하는 것 외에도 도서관에 들를 일들이 많아서 남들은 우리 도서관을 '동네 사랑방'이라고 부릅니다. 작은 도서관은 그래서 큰 도서관보다 재미있습니다.
"오늘 고모님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봉사활동 못 나오십니더." "그람 직접 가지는 못해도 부조는 해야죠. 부조금 대신 좀 내주이소. 나중에 드릴게." 우리 도서관 고모님은 사서인 저와 처음 인연을 맺은 자원봉사자입니다. 도서관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이유로 '고모님', '이모님'으로 통하지요. 때론 이런 자원봉사자들과 '시월드' 놀이도 합니다.
다들 의아해할지도 모르겠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번씩은 힘들어하는 봉사자 엄마들을 위해 사서인 제가 먼저 시어머니 역할을 합니다. 도서관에서 두루두루 일처리를 잘 하는 분은 당연 큰며느리가 되고, 갓 들어온 자원봉사자는 막내며느리가 되어 심부름을 하며, 점심을 준비해 함께 먹기도 합니다.
정감 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작은도서관'... 그래서 좋습니다
그렇게 먹으면서 서로 남편 얘기도 하고, 애들 얘기에 웃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냅니다. 시장 가다 들러 '사다리' 타고, 볼 일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장에서 사온 찬거리를 풀어놓으면 주섬주섬 얻어먹기도 하고, 저녁반찬으로 나누기도 한답니다. 도서관에서 사서가 사서임을 내세우기보다, 친근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또한 중요한 도서관 자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늘 깨닫고 삽니다.
우리 작은도서관에선 누가 사서고, 누가 자원봉사자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이렇게 지내온 지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처음 자원봉사자와 사서로 만난 인연, 이제는 남편과 아침에 싸운 이야기, 아이들과 공부 때문에 열 올린 이야기까지, 그리고 어디가 아픈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만드는 이야기부터 별별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도서관은 책과 엄마들의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작은 도서관은 정감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큰 도서관보다 재미있습니다. 오랜 인연도 그래서 좋은가 봅니다.
도서관이 인연이 되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준 자원봉사자, 그들의 얼굴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작은 일이지만 서로 기쁨도 나누고 때론 좋지 않은 일도 함께 걱정해주며, 사사로이 정을 나누며 지냈던 자원봉사자들. 그 한 분 한 분 모두가 내게 있어 소중한 인연입니다.
책 정리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그들. 책 읽어주는 것, 독후활동으로 책 만드는 것, 예쁜 소품 만드는 것, 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것, 도서관 아침 문을 열고 구석구석 청소하는 것, 인사하는 것, 말 안 통하는 꼬마나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 제일 자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이 있어 힘이 납니다.
부족한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서관은 진정 이들이 있어 더 함께하고 싶은 공간이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작은도서관의 미래는 더 밝고 환하리라 감히 확신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