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이동은 여행의 꽃이다. 익숙한 것을 떠나는 안타까움과 새로운 것을 본다는 두근거럼 사이에서 여행자가 겪는 방황은 언제나 치열하다. 그즈음, 나는 확실히 새로운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여행 5개월 차에 들어선 징크스이기도 했고 한국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산호세를 떠나기 전날, 나는 남은 여행을 어떻게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은 이대로 중앙 아메리카의 끝인 과테말라까지 가는 버스를 타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생겼다. 고민 끝에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살아있는 것'을 보러 몬테베르데(Monteverde)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코스타리카는 화산과 생태공원, 야생동물의 낙원이다. 니카라과와 파나마 사이에 위치한 이 작은 나라는 국토의 25%가 국립공원과 보호구역이며 전 세계를 통틀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야생동물이 분포한 땅이다. 나라이름도 '풍요의 해변'(코스타리카)이다. 영화 <쥬라기공원> 대부분의 촬영지가 바로 코스타리카의 국립공원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몬테베르데에 도착했을 때는 오락가락하는 비로 이미 온 마을 안이 짙은 풀냄새로 가득했다. 때마침 출발하는 캐노피 투어(Canopy Tour) 차량에 몸을 실었다.
캐노피 투어는 몬테베르데 지역의 정글에 어지러이 설치된 와이어를 타고 정글을 이동하는 일종의 놀이기구다. 안개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는 정글을 와이어 하나에 의지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데, 가이드가 있는 출발지를 벗어나 정글 한가운데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든다.
두 시간 내내 14개의 와이어를 모두 이동해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 3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나는 마침내 야생동물 관찰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친절이 몸에 밴 가이드를 따라 플래시 불빛에만 의지해 시작된 정글 탐험에서 가이드가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불빛을 하늘로 비추었을 때, 나는 왜 이 투어가 밤에만 진행되는지를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 그려 넣은 것처럼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잠든 새들. 아마도 저 새를 보는 건 오늘이 우리 생에 마지막일 거라는 가이드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아 나는 그 아름다운 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몬테베르데 정글의 생태 투어는 아프리카의 야생과는 사뭇 다르지만, 발걸음을 뗄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숲속을 이리저리 헤매다 발견한 선명한 초록빛의 팜 바이퍼(Palm Viper)와 타란둘라는 실제로 보면 아름답기까지 했다. 물론 동물들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여기에는 조류, 곤충, 파충류만 사느냐"고 물어봤더니 가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원숭이와 고양이과 동물이야기를 꺼냈다. 원숭이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불빛을 발견. 사람들은 다시 숨을 죽였다.
잠시 이야기를 멈추니 두 개의 불빛이 조금씩 흔들린다. 얼핏 보면 새끼 고양이 같은 녀석은 선명한 표범 무늬가 있는 퓨마였다. 불빛을 비춘 지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녀석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누군가가 그 우연한 조우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 놀라운 밤의 정글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확신했다. 카리브해 해적들이 어깨를 내주었던 앵무새의 원산지는 코스타리카다.
하늘마저 가려버린 운무림나뭇가지 높이 올라앉은 나무늘보를 보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고래 떼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와이어를 타고 정글 위를 나는 것이 카리브해라면 두발로 걷는 정글은 어떨까.
이튿날, 왔으니 할 건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도착한 몬테베르데 자연보호구역(Monteverde Cloud Forest Reserve)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지역이 구름에서 벗어나는 날은 1년 중 손에 꼽을 정도란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운무림(Cloud Forest) 이다.
입구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무조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있는 곳을 목표로 삼았다. 특별히 오르막도 아니었다. 하늘을 가득 덮은 정글 덕분에 제법 비가 몰아치는데도 실제로 몸에 떨어지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넓은 길이 끝나고 표지판을 지나니 어느덧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하늘마저 닫혔다. 그곳을 걷자 묘한 흥분이 일었다. 어느 만화에서 가져다 놓은 듯한 덩쿨과 어지럽게 얽힌 나무들은 어디선가 타잔이 퓨마를 타고 뛰어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풍경을 연출했다. (치타는 정글이 아닌 사바나에 살기에 타잔이 치타를 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처음에는 간밤의 경험을 살려 무엇이 되었든 살아있는 것을 찾으려 고개를 들고 나무 위를 훑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 고개가 아플 즈음 부질없는 탐색을 그만뒀다. 하늘을 덮을 만큼 나무가 우거진 운무림 속에서 숨어있는 앵무새를 찾기란 쉽지 않다.
중간중간 요란한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가이드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 속에서 어떻게 앵무새를 찾느냐고 물었더니 새들에게도 일정한 구역이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도착한 언덕에서는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적을 잃은 채 이리저리 헤매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살짝 부는 바람에도 출렁이는 그 붉은 다리에 올라 좌우로 펼쳐진 정글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엉뚱하게도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의 시가 생각났다.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었네'온통 푸른색뿐인 이 운무림에서 마치 '세상에 푸른 숲만 있는 건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한 붉은빛. 다리를 건너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하늘을 보니 어느새 뒤편으로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세차게 퍼붓는 비를 피해 속력을 내 다시 입구로 빠져나왔다. .
내생에 이 운무림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까? 그렇다면 보지 말아야 할 곳이 하나 더 늘었다.
간략여행정보 |
산호세에서 매일 오전 6시, 낮 12시에 각각 몬테베르데 마을로 가는 버스가 있다. 이동시간은 4시간 반이지만 오전에 도착해서 캐노피 투어와 야간생태투어를 한번에 하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와이어를 타고 정글 사이를 나는 이곳의 캐노피는 전세계에서 가장 길고 빠르기로 유명하다.
몬테베르데 마을은 운무림에서 진행되는 여러가지 투어만을 위한 베이스 캠프로, 그 외의 것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몬테베르데 운무림을 보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매 시간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면 되며, 꼭 정류장이 아니더라도 지나는 길 아무데서나 타고 내릴 수 있다. 운무림의 트레킹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길을 둘러보는 데는 반나절 정도가 소용되지만 여러 개의 코스가 있어 선택할 수 있다. 혹시 야간생태투어를 놓쳐서 몬테베르데의 야생동물을 미쳐 보지 못했다면 공원 입구에서 가이드를 고용하자. 전문 망원경과 레이저를 들고 억지로라도 찾아서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아래는 몬테베르데에서 할 수 있는 각종 투어가격(2012년 12월 기준) 운무림 입장료 : 18USD 캐노피 투어 : 40USD 야간생태투어 : 20USD
좀 더 자세한 몬테베르데 여행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45525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