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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 외식하기가 드문 일인데 어제는 바로 그 드문 날에 해당한다. 내 고향마을 폐교를 자연생태 학교로 개조해서 운영하는 지인이 찾아 온데다가 최근에 딸을 시집보낸 아랫동네 분이 한 턱 내겠다며 합류한 까닭이다.

멋진 식당의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으려고 하는데 내 시선을 가로막는 강력한 심리적 장애물이 있었다.

'신발 분실 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식당 식당 입구
▲ 식당 식당 입구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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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많이 접하는 문구다. 이런류의 경고성 문구들. 그래서 어쩌라고? 신발주머니라도 있나 봐도 없다. 신발을 품에 안고 들어가? 도대체 답이 없다. 신발에 이름표라도 달아야 하나? 내 책임 아니라는 전형적인 책임회피성 문구다.

지난주에 전주시내 어느 문화센터에 강의를 갔었는데 입구에 '주차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는 것과 '관계자 외 주차 시는 바로 견인하겠다'는 비문화적인, 책임회피성 협박문이 있었다.

사진 문화센터에 붙은 경고문
▲ 사진 문화센터에 붙은 경고문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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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근처에서 철도 건널목을 건너는데 '언젠가 당신도 건널목 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현수막이 있었다. 참 고약한 문구다. 최근 어느 신문에 실린 현직경찰관이 쓴 칼럼의 제목은 '졸음운전은 당신을 잠재울 수도 있다'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런 건 뭐 아예 협박에다 공갈에다 저주에 가깝다. 참 살벌하다. 공공기관과 공인이 이럴진대 일반인은 어떠할지 미루어 짐작이 되는 바다.

졸음운전과 관련된 최악의 문구가 떠오른다.

작년에 해인사에서 열린 대장경세계문화축전을 보러 가다가 발견했다. 당시에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거창군 가조면 가조온천단지에 가서 여러 날 온천휴양을 즐기다가 가던 길이었는데 스님들도 많이 볼 텐데 어찌 방치될까 머리가 쭈뼛할 정도였다.

'졸음·죽음'이라는 붉은 네온사인이 88고속도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졸지 말라는 운전자에 대한 권유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죽음이라는 극단의 비유를 통해 얻을 것은 없어 보인다. 인터넷 어디를 뒤져도 졸음운전 방지법에 "죽을래?"라는 경고문이 유효하다는 것은 없다.

사진 끔찌한 경고문
▲ 사진 끔찌한 경고문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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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도 이런 방식은 부작용이 크다고 말한다.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의도와는 반대방향으로 현실화 한다고 지적한다. 동생을 때리는 큰 애를 부모가 때리면서 동생 때리지 말라고 훈육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동생을 때리지 말라는 부모의 말이 학습되는 게 아니라 뭔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주먹으로 해결 한다는 부모의 폭력이 학습된다는 것이다. 우리 일상 속에 폭력문화가 이토록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 하는 순간들이다. 세월호 같은 참사도 결국은 초대형 폭력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상의 작은 폭력들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면에서 구원파 신도들의 현수막은 매우 인상적이다. '확대수사 안 한다더니 '뻥'치시네', '검찰발표, 침몰원인, 믿어도 됩니까?', '언론종사자 여러분 언제까지 받아쓰기만할 겁니까?'는 현수막들은 참 신선했다. 언론과 수사당국에 대한 항변과 함께 조롱을 담고 있다. 살기어린 절규 대신 문제의 핵심을 바늘처럼 찌르는 재기와 여유가 묻어난다.

휴게소 화장실에 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릅답습니다'는 뒤처리 하나로 아름다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판가름하는 것이라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봐 줄만하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뿐이 아니다'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와 미묘한 성적 자극이 담겨 있어 영 께름칙하다. 요즘도 운전석 머리맡에 붙어있는 버스가 모르겠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는 살벌한 표어.

얼마 전에 녹색당 농업위원회 모임에서 본 화장실 문구가 새롭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좌변기 옆에는 '휴지를 변기 안에 버리면 저희가 참 힘듭니다'라는 풀잎처럼 부드럽고 봄바람처럼 감미로운 안내 문구가 있었다.

고백형 권유문이다. 경부선 고속도로에는 '졸음쉼터'라는 팻말과 함께 우리 집 마당만 한 휴식소를 군데군데 만들어 두고 있다. 팻말 하나에도 한울님을 모실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사진 졸음쉼터
▲ 사진 졸음쉼터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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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불교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히 10여년 전부터 각종 현수막 문구를 사진으로 찍고 있습니다. 실상사 갔다가 입구에 붙은 현수막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게 시작입니다.



#졸음#현수막#부드러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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