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트레킹을 마친 다음날 몸을 일으켜 보니 발목과 어깨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커진 외로움과 그리움은 새해를 이틀 앞두고 다시 온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터질 듯 말 듯, 팽팽하게 부풀어 바닥난 몸 상태가 두려웠다. 조금 더 쉬어가도 좋으련만 이대로 드러누웠다가는 한국에 있을 때의 내가 그랬듯이, 그저 지난 몇 개월간에 대한 투정이 시작될 것만 같아 다시 배낭을 업었다.
오메테페섬을 빠져 나와 그라나다(Granada) 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했더니 태국에서나 볼 법한 택시를 타라는 장사꾼들이 한가득 몰려왔다. 얼마나 걸리냐 물었더니 1시간 반이란다. 처음에는 20달러라고 하더니 내가 발걸음을 돌리자 15달러, 다시 10달러까지 떨어졌다. 무슨 독한 마음을 먹었었는지, 1시간 반을 이동하는 대가치고는 무척 싼 택시를 내버려두고 나는 다시 짐짝처럼 치킨버스에 올랐다.
자동차보다 마차가 어울리는 도시 '그라나다'
제 3세계인 중미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졌지만 코스타리카에 밀려 여행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니카라과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오래된 콜로니얼 도시인 그라나다(Granada)와 레온(Leon)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라나다의 중앙시장이다. 그 중에 하나인 그라나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있는 시장 한켠에 눈에 띄는 멋진 건물 덕에 숙소를 찾아 헤매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호스텔은 다섯걸음만 내딛으면 사람 냄새 가득한 전통시장거리와 달리 엔틱 가구와 멋진 예술품으로 잘 꾸며져 있었는데 숙소라기 보다는 대저택에 가까웠다. 그런 집이 하룻밤에 고작 우리돈 7천 원이라니.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간단히 끼니를 떼우고 정신 없는 시장통을 벗어나니 한적한 거리 곳곳에는 낡고 오래된, 그러나 그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잃지 않은 성당들이 가득했다. 전형적인 콜로니얼 도시의 모습을 한 그라나다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바다를 닮은 호수를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이 그렇고, 자갈이 깔린 오랜 골목과 알록달록한 집, 바람에 나부끼는 거리의 빨래가 어우러진 풍경이 그렇다. 바다색을 닮은 짙푸른 하늘 아래 호수 바람의 선율이 흐르는 곳. 그라나다에는 떠나간 것,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깊게 배어 있다. 도로에 주차된 자동차가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차가 거리를 가로지른다. 자동차는 관광용이고, 주민들은 마차를 타고 다닐 것만 같다.
휑한 겨울 마당과도 같은 그라나다의 거리를 한바퀴 돌아나오는 길에 문득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아직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과테말라를 거쳐야만 북미인 멕시코에 닿을 수 있지만 이제 그리운 풍경은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에 과테말라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길래 버스터미널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앞으로 일 주일은 버스에 좌석이 없단다. 그러고 보니 이틀 후가 새해다. 지친 몸을 어디에 뉘어야 할지 몰라 정처없이 헤메이다 여행사들이 몰려 있는 곳에 닿았다. 결국 이번에도 나의 선택은 화산이다.
지옥문의 입구 '마사야 화산'
단체 손님이 탔는지 유난히 요란했던 투어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아직도 마그마가 끓고 있다는 마사야 분화구(Volcan Masaya)였다. 언덕에 올라 인적이라고는 없는 벌판을 바라보니 시야에 닿지 않는 저 먼 곳까지 화산의 영향으로 검게 패인 평야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는 심한 유황 냄새가 실려 왔다.
마사야 화산의 인근에는 5개의 분화구가 있는데 그 중 두 군데에서는 아직도 마그마가 끓고 있다. 오메테페의 콘셉시온과 비슷하겠거니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한 마사야 분화구는 차원이 다르다.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180m 깊이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득한 유황 냄새를 사방으로 뿜어댔고 도저히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없을 만큼 심한 연기가 피어났다.
원래는 이 근처까지 사람이 살았는데 어느날 터진 폭발로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언덕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십자가가 세워져 있지만 화산의 활동 반경은 점점 넓어져 이제는 십자가로 가는 출입구마저 봉쇄돼 버렸다.
일반적으로 화산은 꼭대기로 가는 경사가 높고, 꼭대기가 뾰족할수록 터질 확률이 높다고 한다. 결국 좁고 뾰족한 통 속에서 팽창하던 증기가 터지면서 속에 있던 마그마와 온갖 돌덩어리가 터져 나오면, 그 충격으로 분화구가 충격에 의해 조금씩 깎여 나가면서 구멍이 넓어진다.
분출이 반복되면서 넓어진 분화구가 더 이상 공기가 팽창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화산은 자연적으로 활동을 멈추게 되는 셈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과거에 활발하게 작용했던 세계의 유명한 화산들은 하나같이 꼭대기에 엄청나게 넓은 반원형 분지나 칼데라 호수가 있지 않던가.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처럼 말이다.
안전을 위해 차량으로 잠시 대피를 했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연기가 잦아드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붉은 노을과 화산 연기, 그 사이에서 오묘하게 자리를 잡은 뭉게구름 너머로 불을 밝힌 시가지의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그 풍경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옅어진 연기 아래로 지옥 문이 열린 것처럼 시뻘겋게 타오르는 마그마를 볼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인디언들은 불의 여신인 챠시우티케(Chaciutique)를 진정 시키기 위해 이 끓어오르는 마그마에 여자를 던져 넣었다고 한다. 훗날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여기를 가리켜 '지옥문의 입구'라고 불렀다. 수차례의 화산 폭발과 대지진, 내전을 겪어낸 니카라과인들의 근성은 과연 박수 받을 만하다. 동시에 이제 나는 떠날 때가 되었다.
간략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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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를 대표하는 두 콜로니얼 도시인 그라나다(Granada)와 레온(Leon)은 향수를 느끼고자 하는 유럽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화산과 더불어 주변 자연경관을 보려는 사람들은 그라나다를, 옛 도시의 낭만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들은 레온을 선호한다.
마사야 화산은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과(Managua)와 그라나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느 쪽에서 방문해도 3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시뻘건 마그마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지만, 가스 중독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이드를 동반한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마사야 화산투어는 가스가 잦아드는 일몰시간에 맞춰서 시작되며 가격은 25달러(2012년 12월 기준).
좀 더 자세한 그라나다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5492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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