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31.8도, 습도 60%.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26일 오후 2시께,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사제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신부들과 노란리본을 단 수녀들이 앉아 눈을 감고 묵주기도를 드렸다. 수녀님들의 손목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기억팔찌가 걸려있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말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에 따라,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나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한국 사제 수도자 단식 기도회'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단식 40일을 넘겨 꺼져가는 생명(김영오씨)을 살리려는 절박함을 넘어, 우리의 내일을 위한 절체절명의 기도"라며 전날인 25일 오후 3시께 단식을 시작했다.
광장에 앉은 30여명의 사람들 앞에는 높다랗게 선 십자가와 함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란 말이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이들은 25일 600여명이 모여 함께 미사를 드렸고, 이 중 사제 30여명은 광화문 광장에서 잠을 잤다. 인근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와 광화문 농성장 등에서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노숙 중인 유족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다.
무엇이 교회 안 성직자들을 거리로까지 나오게 했을까. 26일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최재철 신부(천주교 수원교구)는 "유가족들을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정의가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밤새 경찰 버스에서 나는 공회전 소리와 차 소리, 먼지 등으로 한 숨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한 최 신부는, 이어 특별법 제정과 관련 "정부와 대통령이 자꾸 지키지도 않을 약속들을 하는데, (법 제정을 통해) 부디 약자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 근본적 질문 던져...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 찾아야"
유족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잠을 잔 한 신부는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수사님들이 변변한 깔판 하나 없이 다들 한 두 시간의 쪽잠을 잤다"며 "흡사 내전(內戰)이 일어난 나라에 온 것 같습니다, (교황의 말처럼) 실로 거리로 나가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입니다"라고 썼다.
김인국 신부(청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총무) 또한 "괴롭고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에서는 비이성적인 기도회가 필요하지 않는가"라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국가란 뭐냐, 인간이 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 수는 없다, 뭐가 됐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도회는 약 2~3시간 간격의 묵주기도와 매일 오후 6시 30분 미사가 예정돼있다. 그러나 기도회가 언제까지 열릴지, 단식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측은 "자유롭게 단식에 동참하되, 최소 10명의 성직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식하며 광장에 있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앞서 광화문 농성장 앞에서는 또 다른 동조 단식에 참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전 11시께 전국금속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김영오 조합원 생명살림' 기자회견에서 전규석 금속노조 위원장은 "오는 27일부터 수도권 조합원들이 광화문 단식농성장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시인 고은, 소설가 공지영 등 국내 주요 문인 2000여 명이 회원으로 있는 진보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도 이 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6일부터 31일까지 릴레이로 집중 단식에 참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