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로 병학이를 잃은 이후식, 박지원씨 부부는 오늘도 어김없이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첫차를 탔다. 지난해 12월 유가족들과 함께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추운 겨울을 버티면 어떠한 답이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눈사람이 되고 장대비를 맞으며 견딘 시간이 300일을 넘었다.
국가에게 버림받은 국민...대한민국의 현 주소
돌이켜보면 부부에게 병학이를 잃고 버텨온 지난 15개월은 기다림과 분노, 오기로 범벅된 시간이었다. 사고 직후 정부가, 교육부 장관이 명예를 걸고 양파 껍질 벗기듯 시간대별로 조사해서 책임자 처벌은 물론 잘못된 관리·감독 역시 엄중 처벌하겠다고 했건만 뭐 하나 제대로 지켜진 것이 있던가?
아이들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교육부는 사고 대책반에 보상 관련 사무관을 한 명 파견하는 것으로 입을 씻었고, 검찰은 사고 업체의 실질적 소유주인 H기업에 대한 수사조차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했다. 무자격 교관과 체험 활동의 불법적인 위탁·재위탁 운영 등으로 사고가 났건만 사고업체 대표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해병대 캠프에 대한 관리 감독 책임이 있었던 태안군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사고 업체는 상호만 바꿔 영업을 재개했다.
거짓말같은 일련의 사태에 엄마 박지원씨는 정신과 약에 의지해 간신히 일상을 버텨왔다. 아빠 이후식씨는 아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생업을 접고 오늘도 청와대, 국회, 법원을 전전한다.
단지 그들뿐이랴. 국민 모두가 알고 있듯 세월호 유가족들 역시 허망하게 자식을 보내고 거리에서 2개월이 넘게 힘겨운 노숙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집에 이어 분향소, 국회, 광화문 그리고 청와대 인근 청운동에 이르기까지, 졸지에 집이 5개나 되어버린 이들이 바라는 건, 오로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달라는 게 이들이 귀한 자식의 목숨 값으로 요구하는 전부다. 그러나 국가는 묵묵부답이다. 사고 직후 애도로 눈물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국가는 얼굴을 바꿔 유가족의 농성은 불법이라며 공권력으로 위협한다. 당신들 때문에 나라 경제가 휘청거린다 비난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선동한다.
오늘 우리가 조국이라 믿었던 국가의 민낯이 궁금하다면 당장이라도 서울 시청과 광화문 일대에 나가보시라.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동료를 잃은 장애인이, 갈 곳 없는 노숙자가 그 거리를 메우고 있다. 국가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사회에서 보이고 들리는 존재로 다시 서기 위해 참담한 하루를 또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예외적 존재가 아니다. 기본적 노동권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일터에서, 학생이라는 이유로 단속과 폭력에 노출된 학교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을 감수해야하는 사회에서, 존재의 소중함보다는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하라 모욕하는 일상에서, 우리 역시 벼랑 끝에 서 있다. 절망과 불신이 깊게 뿌리 내린 이 시대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되짚고,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역설하는 책이 나왔다.
책<국가 없는 사회>는 "평생 일을 멈추지 않은 노동자이자 무장봉기를 이끈 지도자, 총파업을 꿈꾸며 인민을 조직한 활동가"였던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쓰고,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연구활동가 하승우씨가 번역했다.
1900년대 초반 '이탈리아의 레닌'(말라테스타는 자신은 결코 지배자, 폭군이 아니라며 그러한 표현을 거부했다)이라 불렸던 말라테스타와 2014년 이 땅에서 자치와 자율, 분권을 주장하는 하승우, 그리고 출판하기 좋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을, 시장성이 아닌 호혜를 선택한 출판사 포도밭의 만남은 저자와 번역자, 출판사, 그리고 저자 사후라는 한계와 시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더구나 이 책이 한 세기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의 현실에 비춰 읽어도 손색없을 만큼 날카롭다. 책을 읽는 내내 생생한 토론의 현장에 함께 앉아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묻고 답하고, 반론하는 대화적 구성과 쉽고 간결한 언어의 사용은 자칫 지루하거나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대화를 명쾌하면서도 집중력 있게 전달한다.
소유제와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조르조라는 가상의 인물이 이탈리아의 한 모퉁이 카페에서 노동자, 치안 판사, 공화주의자 등 다양한 인물과 만나 국가와 사회에 관해 나눴던 대화와 논쟁을 담은 이 책은 모두 17일간의 만남을 담은 17장으로 구성돼있다. 물론 혁명 운동과 투옥 등으로 사실 23년간에 걸쳐 완성됐지만 말이다. 말라테스타는 가상의 인물 조르조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의 악은 어떻게 출현했는지, 과연 정부가 인민을 대변할 수 있는지, 경찰은 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지, 소유 제도의 혁명은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인간의 온전한 자유와 자치는 국가(정부) 없는 사회에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국가 없는 사회란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는 사회혁명"이다. 이를 위해 동시에 진행돼야 할 변화는 소유 제도와 생산·교환체계의 완전한 변화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혁명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따라서 노동에 따른 그는 "착취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일하며 자신들이 합의한 관행에 따라 자기 노동의 성과를 즐길 수 있는" 사회를 주장한다.
소유제의 폐지와 더불어 그는 "사회를 위에서 지배하고 자신의 의지를 강제로 요구할 수단을 가진 기관", 즉 국가의 폐지를 주장한다. 지금의 대의제와 선거 제도로는 수천 개의 다양하고 다른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절차와 도구들이 오히려 지배를 강제하는 권력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란 필연적으로 "대중을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고", "입법부와 행정부 전체는, 법과 군대, 경찰, 판사 등을 갖춘 정부 전체는 민중을 통제하고 착취를 보장하는 쪽으로만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권력을 없애고 인민들이 스스로 세운 자유로운 규범들을 사회의 중심 운영 원리로 세울 것을 주장한다. "사회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권력이 아닌 평등과 연대에 기댄 인민들의 자유로운 협약만이 노예적 복종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민을, 자율과 자치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뭔가를 더 할 수 조차 없는 나쁜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의 분명한 숙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도 계획을 적용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일깨운다.
그는 혁명을 기도한다. "인민이 자유의 시간을 경험하고 자신들의 힘을 판단"(124쪽)하게 되면 결코 이 이후의 시간은 과거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지배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한 어떤 사회 상태든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될 수 있기"(111쪽)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말라테스타의 주장은 매우 익숙하고 원칙적이지만 그가 살아냈고 책을 썼던 시기가 한 세기 전이라는 점에서, 또한 비판을 넘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정을 담금질 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과 사유엔 힘이 있다.
아나키스트의 세계관을 쉽고 능숙하게 담아낸 입문서라고 그 의미를 한정하기엔 인간이 가진 힘과 희망에 대한 믿음이 이 책 안에 있다. 부질없는 몽상이라 치부하기엔 상처받고 모욕당한 삶을 부둥켜안고 제발 내가, 내일이 벼랑 끝이 아니기를 기원하며 하루하루 버텨야하는 현실이 있다. 하여 국가 없는 사회란 절대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 뒷걸음치는 순간 그는 말할 게다.
"그럴 경우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자신을 둘러싼 냉혹한 폭력에 항상 노출될 겁니다. 그래요, 그게 현실이죠. 민중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무얼 하면 되는지 모르거나 설령 알더라도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길 원치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노예이지요." (102쪽)국가 '이후'의 삶을 설득하기
밀양의 할매들을 만나며, 형재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만나며, 참사의 유가족들을 만나며,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들을 만나며 나는 진심으로 그리고 때론 비아냥으로 '이따위 국가라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인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국가에 대한 비판도 날이 섰지만 한편으로는 선의로써, 마음만으론 보장될 수 없는 인권을 위해 국가에 대한 기대를 다 접진 못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 <국가 없는 사회>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는 '과연 언제까지 존엄을 부인당하는 일상을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가 나또는 우리 가족이 아님에 감사하며 버텨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자라서 만나게 될 세상이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곳으로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없는 사회가 실현가능한가'라는 질문 대신 새롭게 묻고 답하기로 했다. 이러한 사회를 감내할 수 있겠냐고. 순응과 복종의 처세 판단을 생존의 유일한 방안으로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겠냐고. 우리의 힘은 작고 미약하니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 체념과 절망을 설득할 수 있겠냐고.
그 어떤 질문에도 "더 이상은 ..."이란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국가 없는 사회는 상상되지 않지만 그 불확실함에 짓눌려 오늘을 살고 미래까지 저당 잡히기엔 내 삶이, 내 가족의 삶이, 내 이웃의 삶이 너무 참담하다. 하여 마음을 고쳐먹는다. 개종을 선언한다. 우리에겐 힘이 없다는 절망과 체념 대신 작음 힘들에 내 힘 또한 보탤 것이라고. 지배와 억압대신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도전할 거라고.
설령 그 길이 뿌연 안개 속에 있을지라도, 내딛는 나의 걸음이 때론 망설임과 주저함으로 지체되더라도, 하여 뒤돌아보니 비틀거린 발자국이 훨씬 더 많을지라도 지배와 억압으로 모욕당한 종속적 삶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꿈꾸는 세상과 맞잡은 손이 있으니 더 따스하고 인간답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국가 없는 사회>(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포도밭/1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