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되면, 매번 고아가 된 심정"이라고 고백하던, 독립언론인 베르나르 아스크노프를 만났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치 병풍처럼 머릿속에 한 폭의 풍경이 펼쳐졌다.
전선이 무너진 시대의 전사가 보였다. 전선에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 싸움이 얼추 끝난 것인가? 아니다. 둘러보니,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동시다발로 곳곳에서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딱히 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이제 없어졌음을, 동지들과 함께 서서 지키고 서 있을 수 있는 그 경계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적들은 물리쳐도 물리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끝없이 변신해가며 곳곳에 파고들었다. 눈을 떠보면, 어느새 적들의 편에 서 있는 어제의 동지들도 있었다. 혼자가 되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싸움을 찾았다. 숨쉬고 있는 동안, 언제고 나 자신을 압도할, 세상의 바퀴를 굴리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지배할 터이니...이런 감상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르나르 아스크노프는 <모두를 위한 루브르(Louvre pour tous)>의 편집장이다. 한때 그는 거대 노조에 속한 열혈 활동가였다. 노동자면서 노조활동가였고, 재기발랄한 그래픽 아티스트였으며, 한때는 LGBT(성적소수자) 그룹에서도 활약했다.
지금 그는 혼자다. 독립언론을 꾸려서 홀로 싸우고 있다. 전선이 무너진 시대다. 나부끼는 깃발 아래, 신발 끈을 동여매고, 동지들과 함께 달리고 싶어도 깃발은 휘날리지 않는다. 깃발은 있으나 빛바래고 찢겨진 채 축 늘어진 그 깃발은 이미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적장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던 시대를 지나, 이제 그 교활한 적은 무수한 메두사의 머리와, 잘라도 잘라도 다시금 자라나는 도마뱀의 꼬리를 가지고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 평의 그리고 정의까지도 살아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또 다른 한 좌파의 이야기다.
아해(兒孩) 유병언과의 대전<모두를 위한 루브르>
(http://www.louvrepourtous.fr)는 베르나르 아스크노프가 10년 전 만든 인터넷 매체다. 흡사 루브르 박물관의 동호회 이름 같기도 한 이 매체는 프랑스의 공공 문화기관들을 향해 가장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공공기관을 향해 날카로운 창을 겨누게 된 문화 전문 언론이다. 10년 전, 소박한 개인 블로그로 출발한 이 매체가 영향력과 의미를 지닌 전문 매체로 주목받게 된 사연에는 '세월호 참사'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의 조연에 불과했던 유병언이 미디어를 도배하기 1년 전, 아스크노프는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에서 전시를 가졌던 얼굴 없는 사진작가 '아해'의 존재를 추적했다. 그가 구원파로 불리는 종파의 교주이자 사진작가이며, 발명가이기도 한 미심쩍은 행적의 사내라는 사실을 그의 매체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예술계에 전혀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무명 사진작가의 전시를 루브르 박물관이 주관한다는 것 그 자체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다. 비록 본관이 아니라, 정원에 가건물을 세워 진행했던 전시회지만, 파리 시내의 포스터가 붙을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다 점령하기로 작정한 듯한 대대적인 홍보였다.
아스크노프는 이 무명 사진작가의 집념 혹은 집착의 크기와 그 이면에 가려진 실체의 허황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 포스터에 걸린 평범한 사진들은 이 모든 의심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결국 그는 엄청난 기부금을 박물관에 쾌척한, 소위 '메세나'였던 것이 알려지고 동시에 기부에 대한 반대급부로 '세계적인 사진작가'라는 명예까지 단숨에 구입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미 진한 협잡의 향기가 '아해'란 이름에서 맡을 수 있었다.
마침내 이 미심쩍은 사내의 정체가 드러났지만, 아스크노프 외에는 프랑스의 어떤 언론인도 그 사진작가의 실체를 알리는 데 단 한 줄도 할애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크노프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해라는 이름의 돈 많은 남자가 어떻게 메세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례 없이 프랑스 내 가장 권위 있는 장소에서 잇달아 전시를 열고 있는지 추적했다.
아스크노프가 유병언 일가의 행적을 추적하고 보도하자, '아해 프레스'로부터 '항의성'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가 수상쩍은 아해의 행각을 이토록 집요하게 파고든 이유는 유병언에게 있지 않았다. 이런 협잡을 허용하고 있는 프랑스 문화기관, 돈에 취한 문화 권력을 향한 비판이었다.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것은 세월호 참사였다. 참사 5일째, <조선일보>가 세월호와 유병언, 오대양 사건, 사진작가 아해로 이어지는 커넥션을 기사화했다. 이를 시작으로, 세월호 사건의 모든 죄목을 온전히 유병언 일가에 떠넘기는 작전이 전방위로 전개됐다. 아스크노프는 유병언의 프랑스 행적을 추적한 언론인으로서, 한국 언론들로부터 숱한 인터뷰 요청을 받게 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도 아해의 '너그러운' 후원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있다. 후원금을 받기로 약속하고 전시를 허락한 프랑스 문화기관들이 더 있었던 것이다. 2015년 개관 예정인 파리필하모니, 그리고 2014년 여름으로 예정돼 있던 콤피엔느 숲의 축제까지 연루된 사실을 그가 연이어 밝혀냈다. 아스크노프는 전시를 포기하지 않은 기관들을 찾아 추가로 폭로했다.
점차 프랑스 언론들도 그가 전하는 소식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문화 기관은 아해가 누구인지, 어떤 돈으로 그는 프랑스 문화계를 흥분 시키는 메세나 노릇을 해왔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300여 명이 침몰해서 희생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도 연루가 되어 있었지만, 관련 기관들은 받기로 약속된 후원금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를 위한 루브르>의 적극적인 협력 하에, 파리 한인들이 함께 이 기관들의 파렴치함을 지목하는 공개편지를 썼다. 편지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비롯하여 각 기관장 앞으로 보내졌다. 급기야 로항 파비우스 외교부장관의 개입이 있고 나서야 약속된 행사들은 마지못해 내민 손을 거두었다. 유병언이 뿌린 돈다발을 허겁지겁 쫓아가던 프랑스 문화계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16세기 프랑수아 1세 때부터 국가가 예술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예술을 장려하고 후원했다. 이를 시작으로 프랑스인들은 문화정책이라고 하는 고상한 발명품을 인류에 선사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21세기 초, '문화 민주주의'와 '문화 공공성' 사수를 위해 싸우던 전장에는 이제 먼지만 풀썩인다. 전선에는 거의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 떠난 벌판에 남아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다음은 <모두를 위한 루브르>의 편집장, 베르나르 아스크노프와의 일문일답 요지다.
박물관 무료입장을 허하라 - <모두를 위한 루브르>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나? "10년 전이다. 당시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문학을 공부했고, 대형 서점에서 일하면서 노조활동을 했다. 당시 비정규직 문제가 한참 프랑스 사회에 뜨거운 이슈로 부각될 무렵이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활발하게 조직되고 있었다. 프랑스노동자총동맹(CGT) 같은 기존 대형 노조들의 경직성과 관료화를 비웃으면서 우리는 우리만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조직을 만들어갔다.
당시 나는 CGT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대형 체인점에 속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맥도날드처럼 패스트푸드 체인점 노조와 연대했다. 그들의 투쟁에 동참했다. 그때 여러 가지 상징적인 그림들을 만들어서 피켓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많은 이들이 내가 한 작업을 보면서 내게 그래픽 디자이너의 자질이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그 길로 파리에 있는 언론인학교(EMI-CFD, 협동조합 형식의 언론인 직업교육학교)에 등록했고, 그래픽 디자인을 비롯한 언론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직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만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잡지 <시선(Regards)>과 일하게 되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면서, 나는 '예술인의 집(Maison des artistes)'에 등록된 아티스트로서 박물관을 무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 자주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한 6개월쯤 그 혜택을 누렸을까.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에서 더 이상 예술가들에 대한 무료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출입을 막았다. 화도 났고, 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나는 평소 노조에서 해오던 방식대로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당장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운동에 걸맞은 이름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정한 것이 <모두를 위한 루브르>이다."
- 서명운동은 성공적이었나? "완벽하게. 일주일이 안 되서 20여 개의 시민단체들이 이 운동에 합류했다. 이들이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집회를 가지면서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긴 공사 후 다시 문을 연 뉴욕 현대 미술관이 값비싼 입장료를 적용하여, 이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동시에 전개됐다. 이 두 개의 거대한 박물관을 향한 저항운동이 큰 물결이 되어 급속도로 퍼져갔다.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15일이 지나면서, 박물관 측은 미술평론가와 예술가들, 미대생들에 대한 무료입장을 다시 허용했다."
- 와! 대단히 신속한 승리였다. "그런 셈이다. 그런데 이건 우는 아이 젖 주는 격이다. 사실 극히 일부에 대한 예외를 허용한 것에 불과하다. 솔직히 미술평론가들까지 무료입장을 못하게 하는 건 자승자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혜택을 받던 사람들의 범위를 아무리 넓게 잡아도 20만~30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이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간다고 해서 박물관이 실질적으로 손해 볼 건 거의 없다.
1789년 혁명의 결과로, 왕실의 컬렉션을 보관하던 장소였던 이곳이 고스란히 박물관으로 전환됐다. 전 국민에게 무료로 개방되기 시작했던 게 1793년이었다. 이때부터 무려 130년간 무료개방의 원칙이 고수되어 왔다는 사실을 이 싸움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1922년부터 주 1회 무료입장으로 줄어들었고, 1980년대부터는 매달 첫 번째 일요일만 무료 개방했다. 금년부터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오는 성수기에는 아예 없애기로 결정했다. 이대로라면 무료입장이 곧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결정이 오로지 수익성이라고 하는 한 가지 목적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공공문화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그래서 당신의 첫 목표가 달성된 이후에도 <모두를 위한 루브르>는 계속된 건가? "그런 셈이다. 도서관처럼, 온전히 공공의 목적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 박물관의 기능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문화부 산하의 돈벌이 기구로 전락했다. 박물관들은 이제 서로 경쟁을 하고, 오로지 매출을 늘리기 위한 전략에만 몰두해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좀처럼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 나 역시 루브르 박물관에서 파는 생수가 3.9유로(약 6000원)나 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박물관 운영진들은 관람객의 입장에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것인가'이다. 관광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빗속에서 세 시간 동안 줄을 서건 말건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박물관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고, 즉각적으로 투쟁에 나설 만큼 절박한 권리였나? "물론이다. 나도 어렸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님을 따라서 종종 박물관을 다녔다. 하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경우, 낸 만큼 본전을 뽑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자기 방식대로 충분히 여유를 갖고 보지 못하고, 다리 아프도록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무료로 입장을 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관람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래픽 아티스트는 시각적으로 표현된 모든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영감을 얻는다. 나는 산책 삼아서 루브르 박물관을 가기도 하고,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리란 기대로 가기도 했다.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관람 방식이었다."
사회운동가에게 필요한 승리의 경험- <모두를 위한 루브르>의 성과들 가운데 또 기억에 남는 게 있나. "역시 루브르 박물관과 관련해서다. 5년 전쯤, 박물관 지하에 넓게 조성된 상가 카루셀 뒤 루브르(Carussel du Louvre) 안에 맥도날드가 입점할 예정이었다. 완전히 결정되기 전에 그 정보를 입수해서 보도했고,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들이 열화와 같은 관심을 보였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맥도날드가 입점하건 말건 무덤덤했다. 반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사실을 기사화하며 열렬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맥도날드와 동거하는 루브르 박물관의 이미지는 외국인들에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예술의 나라, 문화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팔아왔는데, 정작 자신들은 급속히 쇠락해가는 프랑스의 정신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프랑스에 문화부가 설립된 1959년 이후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이 표방하는 문화민주주의의 과제를 제대로 실천한 적이 있었던가? "답하기 쉽지 않다. 사실 앙드레 말로(작가 출신의 초대 프랑스 문화부장관) 같은 역사적 인물이나 자크 랑(미테랑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함) 같은 전설적인 문화부장관도 그 과제를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자크 랑은 문화부의 예산을 증가 시켰고, 문화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대중화시킨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앙드레 말로는 문화민주주의의 개념을 정립했지만, 구체적으로 실현 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박물관 부문만을 놓고 본다면, 문화부가 존재하기 전에 훨씬 더 넓은 평등이 있었던 셈이다. 지금의 문화부는 공공문화기관들을 채찍질하여 점점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공장으로 가동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점점 더 높은 재정자립도를 요구받고 있다. '아해 스캔들'이 일어나게 된 원인도 사실은 거기에 있다.
여전히 문화부는 문화 민주주의를 말한다. 매년 박물관 입장객 수가 신기록을 갱신하니, 그것으로 문화민주주의에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문화민주주의를 말할 순 없다. 실질적으로 늘어난 것은 관광객뿐이다. 줄지어 들어가 유명한 작품 위주로 빠른 시간에 훑고 나온다. 박물관이 점점 단순히 소모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 나도 루브르 박물관을 갈 때마다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갈수록 돈을 긁어모으는 기계가 되어가는 공간이랄까. 관람객의 편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호젓한 방문을 사절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루브르 박물관과 지하철이 연결되는 매표소에 매표원은 없다. 기계만 달랑 하나 있다. 거기에 길게 늘어서 있는 관광객들을 보면 화가 치민다. 갈수록 사람은 늘어나는데 박물관 관람은 점점 지옥처럼 변한다. "박물관 안에서 작품에 대한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었다. 박물관에 있는 모든 작품들은 시민 모두의 것, 인류 모두의 것이다. 누가 누구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하는가.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시대에, 더 이상 카메라의 플래시가 어떻다는 논리는 별 의미가 없다.
그 불복종 운동의 내용은, 박물관에서 사진 찍는 걸 금지하건 말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위키메디아(위키피디아를 운영하는 사람들. '프랑스 박물관의 친구들'과 함께 진행한 시민운동이었고, 이때의 경험은 <사진 찍는 관람객들(Visiteurs phographiques)>이란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운동의 성과로 문화부에서 헌장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후 박물관에서 사진 찍는 일이 좀 더 관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승리의 경험을 종종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결과적으로 그렇다. 난 단지 폭로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저항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운동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고 그 대안을 실천하기를 희망한다.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불의를 폭로하고, 그 순간 언론의 조명을 받는 운동의 방식도 있다. 일시적으로 매우 만족스럽고 뿌듯하지만, 결국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난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경험들이 축적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내게 세월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당신은 아해가 유병언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나? "15일 동안 인터넷에서 집요하게 추적했다. 아해 프레스의 책임자인 그의 둘째 아들(영문명 Keith)이 단서가 되었다."
- <모두를 위한 루브르>는 혼자서 운영하는가?"그렇다."
- 놀랍다. 게시글들을 읽어보면 개인이 혼자서 운영하는 사이트라고 생각할 수 없다. 문체가 전혀 사변적이지 않다.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정돈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용이 깊고 풍부하다. 이 활동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게 있는가? "없다."
-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사실 나도 그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일을 계속 하면서 어떻게 내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시절도 많았다. 내가 실업상태에서 실업수당을 타고 있을 때 집중해서 사이트를 운영했다. 사실 지금도 거의 실업상태다."
- 왜 그런가?"책을 쓰려고 준비 중이라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모두를 위한 루브르>의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시선> 지에서 웹마스터 겸 웹디자이너로 일을 했었다. 지금은 <시선> 지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쓴다. 계속 언론인으로 일하지만 역할을 바꾼 셈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글 쓰는 데 좀 더 힘을 집중해서 책들을 펴내고 싶다."
- <르 몽드> 지가 당신의 기사를 그대로 도용한 사건은 어떻게 되었나? (세월호 사건에 대해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르 몽드> 지가 어느 날 2면에 걸쳐 세월호 사건의 내막을 대서특필했고, 그 과정에서 <모두를 위한 루브르>를 최소한의 인용 표시도 없이 그대로 차용했다. 그 사실을 베르나르가 자신의 매체에서 언급하자 이번에는 적반하장으로 기사를 정정하지 않으면 중상모략으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한 일이 있었다.)"조심스럽게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 한층 더 강하게 그들을 고발하는 글을 다시 올렸다. 그 글을 해당 기자에게 보냈다. 그 기자는 나에게 자신이 철저하게 사건을 추적하지 않았음을 인정했고 조용히 넘어갔다."
- 기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기자들 대부분이 긴 시간에 걸쳐 사건을 추적하고 파헤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사건이 스스로 볼륨을 키우기를 기다리고, 그게 커졌을 때 한꺼번에 터뜨린다. 그리고는 책장을 넘긴다. 한 번 크게 떠들었으면 이제 그 얘긴 끝난 거다. 하지만 나에게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 아이들이 300여 명이나 있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10명이나 있다. 세월호 사건은 진행 중이며, 아해를 둘러싼 의혹도 밝혀지지 않았다."
- 당신의 운동을 함께 진행할 동지가 필요하지 않은가? "사실 바로 그 점이 요새 고민하는 부분이다. 이 사이트가 중심이 되어서,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축하면 좋겠다. 지금까진 늘 노조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고, 사이트를 만들면서는 혼자서 진행해왔다. 물론 한참 하다 보니 박물관계에선 나름 유명인사가 되어서 적극적인 독자들도 많이 생겼다. 이제는 협회(association)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일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운동도 진행하고, 재정적으로도 지탱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내가 실업수당을 받지 않아도 이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보기에도 협회를 발족하고 회원들을 구축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2015~2016년이 '한·불 상호교류의 해'다. 그런데 프랑스 측 대표가 앙리 루아예트다. 전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으로 프랑스 문화기관들이 아해를 메세나로 맞아들이게 한 바로 그 주역이다. 로항 파비우스 외교부장관이 개입한 이후에도 그는 아직까지 그 어떤 유감의 표명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외교부나 대사관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닐까. 유병언을 끌어들여 이 풍파를 일으킨 자가 여전히 '한·불 상호교류의 해'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신임 플뢰르 펠르랭 장관이 문화부장관과 이 주제를 가지고 논의를 해봐야할 것 같다. 재불 한인들이 다시 한 번 공개편지를 쓰는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야 한다."그리고 가능하다면, '한·불 상호교류의 해' 기간 중에 정부 측이 진행하는 문화행사 이외에도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운동가들이 만나서 교류하는 시간도 가지면 좋겠다. 이를테면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컨퍼런스를 열 수도 있을 것이다.
- 오! 재미있는 제안이다. 당신은 좌파인가? "물론이다. 내가 좌파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다만, 선거 때만 되면 찍어야 할 정당이 없어서 고아가 된 기분일 뿐이다."
문화는 모두의 것이다"현대사회의 문화에는 계몽하거나 고상하게 할 '민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유혹할 고객이 있을 뿐이다... 문화의 역할은 기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는 동시에, 이미 확립되었거나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들을 유지하는 것이다."베르나르 아스크노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행의 시대>에서 말한 이야기가 송곳처럼 안에서 솟아오른다. 지배계급이 이 모든 것을 '문화'라고 분류하는 순간, 우린 그것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어쩌면 문화부가 생겨나지 않았던 시절, 그들이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한류며 케이팝이며 관광단지며 무형문화재 따위를 만들어내지 않았던 시절, 아니 문화라는 단어가 제도와 자본 사이에서 이토록 역겹게 나뒹굴지 않고, 우리가 그런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조차 없던 시절, 우린 익숙하게 문화를 걸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의심의 회오리가 욍욍거리며 지나간다.
서점 직원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칼럼니스트, 독립 언론의 편집인, 그리고 작가로 진화하고 있는 이 남자. 베르나르는 저잣거리로 쏟아져 나와 흩어지고 길을 잃고만 문화를 한 손으로 꾸역꾸역 쓸어 담고 있다. 뭐 그리 큰 야망도 포부도 없이, 그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의 숲에서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는 그 소박한 사치를 모두와 나누기 위해서...